*이 글에는 영화 '배니싱 포인트(1971)'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거대한 휠 로더(Wheel Loader) 2대가 도로를 봉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경찰과 순찰차들이 집결한다.
마을 주민들은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하나둘씩 나온다. 캘리포니아의 외딴 시골 마을 Cisco, 그곳 도로변에 모인 사람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헬기의 추적을 받는 흰색의 자동차 한 대가 등장한다. '소실점(Vanishing Point)'이란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그 차, 크라이슬러의 1970년형 Dodge Challenger R/T이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의 화면이 멈추면서 영화는 이틀 전으로 돌아간다. 과연 그 차를 운전하는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는
경찰의 추적을 받는 신세가 되었을까? 관객은 플래시백(flashback)을 통해 남자의 지난 여정을 복기하게 된다.
리차드 사라피안(Richard C. Sarafian) 감독의 1971년작 영화 '배니싱 포인트'는 몬티 헬만 감독의 '자유의
이차선(Two-Lane Blacktop, 1971)과 같이 언급되곤 한다. 두 영화 모두 자동차가 주요한 소재이며, 그것을 통해
1970년대 미국의 내적 풍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치 영혼의 쌍둥이 같은 이 두 영화 가운데 그럼에도 어느 영화가 더
본질적으로 미국의 내면을 향해 직진하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배니싱 포인트'라고 답하겠다. 인물들의 대화는 지극히 절제되어 있고,
관객들은 오로지 자동차와 속도에 자신을 내맡기며 그것이 주는 의미를 성찰한다. 어떻게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달리는 차를 보며
무언가를 성찰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고 물을 수 있다. 바로 그것을 사라피안 감독은 '배니싱 포인트'에서 구현해낸다.
코왈스키(베리 뉴먼 분)는 자동차 배달 기사이다. 금요일 저녁, 이제 막 일을 끝내고 온 그는 쉴 새도 없이 새로운 일감을
맡는다. 덴버에서 샌프란시스코의 고객에게 Dodge Challenger를 월요일까지 전해주기 위해 그는 빨리 길을 나서야만 한다.
그런 그에게 필요한 것은 Benzedrine(각성제 암페타민) 알약이다. 길을 떠나면서 코왈스키는 딜러에게 내기를 건다.
월요일이 아니라 하루 앞선 일요일에 인수를 완료하겠다는 것. 그가 내기에게 이기려고 한다면 과속은 필수이다. 그렇게 코왈스키의
무한질주 자동차 배송극이 시작된다.
고속도로 경찰들이 가만히 구경만 할 리가 없다. 놀라운 운전 실력과 과단성으로 코왈스키는 순찰차들을 따돌리며 농락한다. 그의
질주본능이 맹렬해질수록 추격대의 규모는 점차 불어난다. 코왈스키를 잡기 위해 도로에는 전자 탐지선이 설치되고, 헬기가 뜬다. 무슨
대단한 돈이 걸린 내기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는 이 미친 질주를 시작한 것일까? 관객은 경찰들의 대화, 코왈스키의 회상 장면을
통해 그의 과거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얻는다. 무공훈장을 받은 베트남전 참전 용사, 경찰, 카 레이서, 그리고 이제는 자동차
배송일을 하고 있다.
사라피안 감독은 코왈스키의 여정을 통해 1970년대 미국 사회를 조망한다. 네바다주의 사막을 지나면서 코왈스키는 다양한 부류의
인간군상을 만난다. 무리를 지어 노래를 부르는 오순절 교회파의 신자들, 방울뱀 사냥꾼, 히피족, 느물거리는 악당 게이 커플이
그들이다. 거기에 코왈스키의 길동무가 되어주는 지역 라디오 방송 흑인 DJ 수퍼 소울(Super Soul)도 있다. 코왈스키의
질주극에 매료된 그는 경찰 무선을 도청하면서 방송을 통해 코왈스키를 돕는다. 결국 분노한 백인 순찰대원들에게 수퍼 소울이 가혹하게
린치를 당하는 장면은 1960년대 미국을 달구었던 인종 차별의 한 단면을 재현한다.
"미국의 마지막 영웅, 그의 속도는 영혼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제 문제는 언제 그가 멈추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를 멈추게 하느냐입니다."
수퍼 소울은 코왈스키를 미국의 '영웅'으로, 추격하는 순찰 대원들은 '나치'로 지칭한다. 정말로 코왈스키는 영웅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는 영웅이 맞다. 반영웅(反英雄, antihero)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코왈스키의 삶은 전역 이후 계속
내리막길이다. 오직 '속도'에만 사로잡힌 그는 거의 잠도 안자고 도로를 질주한다. 거기에는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다. 사라피안은
흰색 Dodge Challenger가 펼치는 예술같은 스턴트와 무시무시한 속도를 순도 100%로 잡아낸다. 관객들은 코왈스키와
함께 1970년대 광폭하게 날뛰는 미국 사회의 심장부로 직진한다. 1960년대를 관통했던 흑인 민권 운동, 1969년의
Woodstock과 히피 문화의 폭발, 패색이 짙어가는 베트남전과 반전 시위까지 1970년대에 들어서면 미국인들은 그 모든 상황에
극도의 피로감을 느낀다. 어떤 의미에서 코왈스키의 '질주'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미국 사회 내부의 본능적 반응과
맞닿아 있다.
마침내 코왈스키는 종착지에 다다른다. 거대한 휠 로더와 헬기, 경찰들이 드글거리는 그곳에 그가 빠져나갈 틈은 없다. At
full speed, 그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가속 페달을 밟는다. 그것은 자살인가? Vanishing point, 분명히
코왈스키는 자신을 매료시킨 속도와 함께 사라졌다. '소멸'이 '패배'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물질계에서나 적용된다. 코왈스키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가로막는 휠 로더의 틈 사이로 쏟아지는 환상의 빛이었다. 어쩌면 그는 그 '빛'을 통해 다른 차원의
세계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코왈스키가 유일하게 의지한 '속도'만이 그의 고통을 잊게 할 수 있었다.
죽음으로써 그는 자신을 옥죄는 속도에의 열망에서 비로소 해방된다. 사라피안 감독은 코왈스키의 여정을 통해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미국 사회의 무기력함과 상실감을 담아낸다. 가스펠과 록 음악을 비롯해 컨트리 음악까지 다양하게 선곡된 노래들은
'배니싱 포인트'에 흩뿌려진 보석들과도 같다.
*덧붙이는
글: '배니싱 포인트'의 원래 촬영분에는 스튜디오의 뜻에 따라 최종 삭제된 8분 가량의 영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코왈스키가
시스코에 도착하기 전날 밤, 그는 묘령의 여인(샬롯 램플링 분)을 차에 태워준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코왈스키가 길에서 얼마나
기다렸느냐고 묻자 '너무나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다'고 말한다. 그 분량이 삭제된 것에 사라피안 감독은 늘 불만을 토로했는데,
그것은 죽음의 천사를 의미하는 여자의 등장이 영화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이 있어야만 영화가
완전해진다고 믿었던 감독과는 달리 제작사인 20세기 폭스사는 과감히 잘라 버렸다(이 장면은 유튜브에서 따로 볼 수 있다). 삭제된
8분의 영상을 보고 나서, 나는 스튜디오의 판단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 장면은 영화 전체의 균형을 흐트러뜨리며 비현실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관객에게 그 장면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motorio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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