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에 첫 방송을 탄 BBC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Storyville'은 자체 제작한 다큐를 비롯해 해외의 여러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매우 다양하고 폭넓은 소재와 주제를 망라하는 이 시리즈에는 흥미진진한 작품들이 많다. 작년 2월에 방영된
'The Rise and Fall of a Porn Superstar(2020)'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느 포르노 스타의 흥망성쇠'쯤 될 것이다. 게이 포르노 스타의 7년여에 걸친 성공과 몰락의 과정을 담은 이 다큐는 파격적인 소재가 눈길을 끈다. 아마도
우리나라 공중파에서 이런 다큐를 방영한다면 당장 고객 민원실 전화가 터져나가겠지만, 영국은 좀 다른 모양이다. 이 다큐는
BBC가 직접 제작한 것은 아니고, 2018년에 Tomer Heymann 감독이 만든 'Jonathan Agassi Saved
My Life'를 부분 편집한 것이다. 선정적 소재이다 보니, 과도한 수위의 장면이 약 15분 가량 삭제되었다. 제작자
Heymann이 인터뷰에서 이 다큐를 영화제 상영용 무삭제 버전과 편집 버전 두 가지로 만들었다고 하니, BBC의 자의적 편집은
아니다.
다큐의 주인공은 이스라엘 출신의 Jonathan Agassi라는 게이 포르노 배우이다. 다큐는 그의 일상과 가족의 모습을
따라가며 포르노 배우가 아닌, 인간 조나단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해준다. '조나단 아가시'라는 이름은 예명으로 그는 그 이름으로
시작한 배우로서의 삶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다큐의 원제목 '조나단 아가시가 날 살렸다'라는 뜻은 자신의 예명이 불운한 성장기를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뜻이다.
다큐는 평범한 일반인들은 전혀 알 수 없는 게이 포르노 업계의 단면들을 담아낸다. '산업'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그 세계에도
생산자와 소비자가 있고 엄청난 돈이 흘러 다닌다. 매력적인 외모와 연기력으로 단숨에 게이 포르노 영화계를 평정한 조나단은 잘
나가는 스타의 삶을 구가한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업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기 관리를 해내지 못한
조나단은 점점 중심에서 밀려난다. 스테로이드 남용과 마약은 그를 수렁에 빠뜨린다.
그런 몰락의 이면에는 불행한 성장기와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가 자리한다. 조나단은 11살 때, 아버지로부터 '호모 같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지극히 이기적이며 뻔뻔한 이 아버지는 이혼의 원인을 아들의 탓으로 돌린다. 딸을 원한 아내가 조나단이
태어나자 우울증에 걸렸다는 말까지 한다. 조나단은 물론 조나단의 어머니까지 남편의 파렴치함에 분노한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어른이 된 이후에도 조나단의 정서적 불안정성을 심화시킨다. 결국 마약 중독이 심해진 그는 포르노 업계를 떠난다. 그렇게 고향에
돌아온 조나단이 수퍼마켓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막과 함께 다큐는 끝난다. 'Rise and Fall'이라는 말을 그대로 실감케 하는
그 끝을 보면서, 욕망과 성공 뒤에 도사린 허무함과 고통을 발견하게 된다.
다큐 속에는 마약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조나단을 감독 Tomer Heymann이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모습도 담겨져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도 참 못할 일이네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런 상황에서 제작자는 과연 어떤 윤리 기준을 가지고 개입의 시점을 결정해야하는 것일까? 게이 클럽부터 마약 복용 장면에 이르기까지 이 다큐는 다큐멘터리 제작의 경계선을 탐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들에게 그 모든 것은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포르노 배우에 대한 흥미 위주의 피상적이고 선정적인 탐구가
아니라, 조나단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에 진지하게 접근하려고 한 진정성이 느껴진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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