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긴장증(緊張症, catatonia)을 앓고 있다. 어느 순간 몸이 돌처럼 굳어버리고, 주위의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증상. 전쟁 중 군인으로 복무했던 여자는 부상을 입어 머리를 다쳤다. 여자를 괴롭히는 그 증상은 그때부터 생긴 것이다. 여자에게는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이 있다. 어느 날 저녁, 아들과 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여자에게 긴장증이 도진다. 마침 아이는
마루 바닥에 누워있었다.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버린 엄마의 몸에 아이가 깔린다. 영화 'Beanpole(2019)'의 초반부에
나오는 그 장면은 매우 짧지만, 관객에게는 극도의 공포와 고통을 유발한다. 러시아의 신예 감독 칸테미르 발라고프(Kantemir
Balagov)는 이 영화에서 전쟁이 여성에게 남긴 깊은 상흔에 대해 탐구한다.
키가 무척 큰 일랴는 사람들에게
'키다리(beanpole)'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그 비극적인 사고로 아들을 잃은 직후, 일랴는 전선에서 돌아온 친구의 방문을
받는다. 마샤는 일랴를 따뜻하게 위로한다. 그런데 마샤와 일랴가 나누는 대화에서 관객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은 아이는
일랴가 아닌 마샤의 아들이었다. 군 복무 중이었던 마샤는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먼저 제대한 일랴에게 보냈다. 일랴는 그렇게
마샤의 아이를 잃었다. 이후 일랴와 마샤 사이에는 우정과 죄의식이 범벅이 된 애증의 관계가 이어진다. 일랴는 마샤가 사귀는 남자를
질투하고 적대시한다. 그런 일랴에게 마샤는 아이를 더이상 낳을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아이를 낳아달라고 요구하는데...
벨라루스의 구술문학가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Svetlana Alexievich)는 1985년, 한
권의 구술사 책을 펴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The Unwomanly Face of War)'라는 제목의
책은 소련의 '대조국 전쟁(The Great Patriotic War, 1941-1945)'에 참전한 여성 200여 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은 그 책에서 영화 'Beanpole'의 단초를 떠올렸다. 영화는 시종일관 암울하고 고통스럽다.
도입부에서 일어나는 아이의 비극적인 죽음을 비롯해 사지가 마비된 상이군인의 안락사 장면, 아이의 죽음을 빌미로 일랴에게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강제하는 마샤의 폭압적 행태까지 영화는 마치 관객에게 심리적 고문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Beanpole'은 결코 대중적 취향에 부합하는 영화는 아니다.
발라고프가 영화 전체를 통해 보여주는 정서는
불안과 고통이다. 그것은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의 '몸'을 통해 가시적으로 구현된다. 전쟁터에서 머리를 다친 일랴에게 긴장증이
찾아오는 순간은 '삐이-'하는 소리와 주변의 멈춰진 풍경으로 묘사된다. 분명히 살아있으나 좀비와도 같은 삶, 일랴의 고통은 마샤의
아이를 잃은 후 더욱 심해진다. 마샤는 그런 일랴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랴의 죄책감을 부추기며 교묘하게
일랴를 지배하려고 든다. 그리고 그것은 불임인 자신을 대신해 일랴에게 아이를 낳아주기를 강요하는 것에서 명백해진다. 일랴의
긴장증과 마샤의 불임, 전쟁을 거치면서 여성의 몸은 그렇게 망가졌다. 영화 초반부에 목욕탕에서 씻는 나신의 여자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보이는 여성들의 몸은 그 어떤 성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극단의 폭력적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된, 그리하여 상처를 입고 견뎌낸 헐벗은 몸이다.
일랴와 마샤가 일하는 병원에 입원한 부상병들의 몸 또한
그러하다. 일랴가 일하는 동안 맡긴 아이와 놀아주는 병사들은 온갖 동물들의 흉내를 낸다. 한 쪽 팔이 절단된 병사가 흉내내는 새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날개가 부러진 새'가 날 수 없듯, 사지가 마비된 군인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의사에게 안락사를 요청한다. 신체적 상해는 전쟁이 인간의 몸에 남긴 가장 분명한 흔적이다. 마샤의 복부에 생긴 흉터도 그러하다.
영화는 상처입은 몸들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알지 못하는 전쟁의 참혹함을 상기시킨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그러나 광포했던 전쟁의 기억과 싸우며 삶을 살아내는 것, 견디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일랴와 마샤도 살아
남으려 애를 쓴다. 다시 아이를 갖고자 하는 마샤의 집착은 필사적인 몸부림이기도 하다. 새로운 생명을 통해 희망을 찾는 것,
문제는 마샤 자신이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데에 있다. 마샤의 재생을 향한 여정은 일랴를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뒤틀린 욕망으로
채워진다. 일랴라고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원하지 않는 관계를 가져서라도 필사적으로 임신하려는 일랴는 자신의 아이로 마샤의
주인이 될 심산이다.
발라고프는 전쟁의 상흔을 미세하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 화면 속에 정교하게 배열된 이미지들로
보여준다. 'Beanpole'의 두 여주인공 일랴와 마샤가 번갈아 입는 초록색과 붉은색의 의상, 그들의 방 벽에 천천히 흘러내리는
초록색 페인트, 마샤가 때때로 흘리는 코피, 그 두 색조는 '재생'과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이웃이 가봉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미친듯이 빙빙 도는 마샤의 모습일 것이다. 나에게 이 장면은 매우 흥미롭게 비춰졌는데, 마치
한국의 샤머니즘(shamanism)에서 무당이 제단 앞에서 도는 장면을 연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당이 굿을 할 때 회전하는
방향은 반시계 방향으로, 그것은 세속의 시간에서 '신의 시간'으로 진입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와는 달리 영화 속에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마샤는 인간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활과 재생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보인다.
마샤는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담은 초록색의 새 옷을 입고 남자친구 샤샤의 부모를 만나러 간다.
샤샤는 마샤를 결혼할 여자로 소개하지만, 샤샤의 부모는 마샤를 냉대하고 조소한다. 아이를 갖고자 하는 일랴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절망한 일랴는 마샤에게 자신의 내면이 텅비어 있다고 말한다. 과연 이 두 여자의 삶에 한 조각 희망의 빛은 비춰질 수
있을까...
'Beanpole'은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이다. 그가 이 영화를 찍었을 때의
나이는 스물 여덟, 나는 영화를 보고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 감독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이십 대의 젊은
감독이 관객을 심리적 심연으로 깊숙이 끌고 가면서, 거기에는 그 어떤 망설임이나 오차도 없다. 위키피디아에 올라온 짧은 이력에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를 전공했다는 사실만 적혀 있다. 삶의 특별한 경험이나 나이에서
오는 연륜이 아니라면, 이 감독이 이런 독특하고 놀라운 영화를 만드는 건 '순전한 재능'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다.
'Beanpole'은 관객을 유사(流砂)처럼 고통스러운 감정의 밑바닥으로 천천히 밀어넣는다. 그럼에도 감독이 착안하고 설계한
영화적 세계는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며, 관객은 그의 영화를 통해 전쟁이 여성에게 남긴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사진 출처: movieinsid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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