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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모어 레너드가 수정주의 웨스턴에 드리운 빛, Hombre(1967)와 Valdez Is Coming(1971)


*이 글에는 두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1886년 3월, 아파치족의 위대한 전사이며 지도자였던 제로니모(Geronimo)가 미군 토벌대의 조지 크룩(George Crook) 장군에게 붙잡혔다. 인디언 전쟁(American Indian Wars)은 막바지에 달했다. 미군은 제로니모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으며, 결국 제로니모와 부족민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포로들을 인계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아파치 부족 사이에서 남다른 외모의 소년을 발견한다. 소년은 인디언의 복식을 하고 있었으나 백인임이 분명했다. 아파치족에게 납치되어 그들과 함께 지낸 것처럼 보였다. 미군은 소년을 데려가서 헤어진 가족과 만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년은 완강히 거부했다. 자신은 아파치족을 떠나지 않겠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소년의 이름은 Jimmy Mackin, 나이는 12살이었다. 소년이 아파치 인디언들에게 납치당한 것은 1885년 8월, 함께 있었던 17살 형은 죽었다. 소년이 인디언들과 함께 지낸 시간은 고작 6개월이었다.

  그 사건은 작가 엘모어 레너드(Elmore Leonard)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소설 집필에 착수했고, 1961년에 'Hombre'를 내놓았다. 마틴 리트(Martin Ritt) 감독은 그 소설을 가지고 폴 뉴먼을 주연으로 영화를 찍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두운 피부색의 인디언으로 분장한 폴 뉴먼이 등장한다. 이 특별한 외모의 남자를 결코 인디언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의 '푸른 눈'에 있었다. 원작에서도 주인공 존 러셀은 푸른 눈(blue-eyed)을 가진 백인으로 나온다. 이렇게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 각색 과정에서 생략된 서사의 맥락을 파악하는 일은 다소 번거롭고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런 경우에는 할 수만 있다면 원작을 구해서 보는 것이 낫다. 엘모어 레너드의 이 소설은 번역본이 없어서, 영문본의 e-book을 찾아서 읽었다. 'Valdez Is Coming(1971)'의 원작도 엘모어 레너드의 동명 소설이다. 그 소설도 그렇게 구해서 읽었다.

  두 소설 모두 단편 보다는 좀 더 긴, 중단편 정도의 분량으로 매우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서부극과 추리 소설의 대가였던 엘모어 레너드의 문체는 번역기의 어설픈 품질을 뚫고 나와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영화 보다 소설이 더 재미있고 강렬하다고 느꼈다. 그가 소설 'Hombre(1961)'와 'Valdez Is Coming(1970)'을 내놓았던 시절은 미국 사회의 격변기였다. 흑인 민권 운동을 비롯해 여성주의와 반전 평화 운동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역사와 문화 연구에 있어서도 이른바 '수정주의적 관점(revisionism)'이 새롭게 부상한다. 고착화된 기존의 시각에서 탈피해서 다각적인 면으로 현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영화와 소설에서도 포착되었다. 엘모어 레너드는 자신의 주특기인 서부극 소설에서 바로 그런 수정주의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소설 'Hombre'의 주인공 존 러셀은 11살에 아파치족에 납치되어 17살까지 인디언과 함께 지낸 인물로 나온다. 실존 인물 지미 맥킨의 6개월은 그렇게 러셀이 보낸 6년이 되었다. 6개월을 인디언과 함께 살았던 맥킨이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동화되었다면, 소설 속 러셀은 외양만 백인이다 뿐이지 그 내면은 인디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존 러셀의 그러한 내력은 생략되어 있다. 그가 어떻게 '옴브레(hombre; 스페인어로 '사나이', '남자'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17살에 가족 곁으로 돌아간 러셀이 적응을 하지 못하고 떠돌았을 때, 미군 기병대와 함께 하며 노새 짐꾼으로 살았던 시절에 얻었던 별칭이었다. 

  영화의 도입부, 인디언 말몰이꾼으로 살던 러셀은 부친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그의 아버지가 상속 재산으로 남긴 하숙집을 처분하기 위해 러셀은 어쩔 수 없이 백인 사회로 돌아온다. 다시 백인의 외모를 되찾았지만, 그에게는 '인디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인디언들과 그들의 땅임을 아는 러셀은 집을 처분한 돈으로 말들을 사려고 한다. 그 일을 위해 러셀은 먼 길을 떠나야만 한다. 마을을 떠나는 역마차에는 러셀과 하숙집 여주인 제시, 하숙집에 머물던 젊은 부부 도리스와 빌리, 페이버 박사와 그 아내 오드리, 그리고 수상쩍은 남자 그라임즈가 오른다.

  마차 안에서 러셀이 인디언들과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페이버 박사는 불쾌감을 표시한다. 한편, 그라임즈는 본색을 드러내며 자신의 갱단과 함께 박사의 돈 가방을 강탈하려고 든다. 러셀의 빠른 총격으로 그라임즈와 갱단은 내쫓기지만, 박사의 아내 오드리가 끌려간다. 박사에게 돈 가방과 아내를 교환하자며 제안하는 그라임즈. 그러나 박사는 결코 돈 가방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 잡혀간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러셀과 일행, 과연 이 여정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페이버 박사의 돈 가방에는 그의 과거가 들어있다.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 정부 관리로 일했던 그는 보호 구역으로 들어오는 물품 액수를 속여 횡령했다. 보호 구역의 인디언들은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가 없어서 정부의 공급에 의존해야만 했다. 터무니 없이 부족한 양으로 공급되는 식량에 인디언들은 늘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런 식량을 가지고 박사는 부정 축재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마차 안에서 나눈 약간의 대화를 통해 러셀은 박사의 돈이 동족 인디언들의 고통과 맞바꾼 것임을 알아챈다. 그러므로 그는 그라임즈가 박사의 돈을 노리고 일행을 위협할 때, 거기에 개입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아는 사람은 러셀 한 사람뿐이다. 거기에다 박사의 아내가 그라임즈의 손에 있다. 러셀은 어쩔 수 없이 일행과 함께 한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목숨을 건 것임을 직감한다. 아내의 안위 보다 돈 가방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박사의 탐욕은 이 사건에서 국외자인 러셀의 고뇌와 명백하게 대비된다. 엘모어 레너드는 '서부'라는 물리적 공간을 윤리적 가치가 충돌하는 정신적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악당 그라임즈, 국고 횡령범 페이버 박사,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다. 마을의 보안관 프랭크이다. 그는 쥐꼬리만한 급료를 받는 보안관의 삶을 내던지고 돈 때문에 강도로 돌변한다.

  엘모어 레너드는 'Valdez Is Coming'에서도 그러한 윤리적 주제를 또 다른 방식으로 변주한다. 멕시코와 인접한 국경 지대 마을의 보안관 발데즈는 총잡이들이 집결한 현장에 출동한다. 지역의 유지이며 목장주인 태너는 탈영병 흑인이 사람을 죽였다면서 사적으로 처벌할 기세이다. 발데즈는 어떻게든 참사를 막으려고 흑인에게 다가가지만, 총잡이 데이비스가 총을 쏘아대는 통에 발데즈는 예기치 않게 흑인을 죽이게 된다. 죽은 흑인에게는 곧 아이를 낳게 될 인디언 아내가 있었다. 자신이 죽인 흑인이 무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발데즈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현장에 있었던 목장주 태너와 마을 유력 인사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발데즈. 그는 인디언 미망인을 위한 돈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청원은 거부되고, 마침내 발데즈는 행동에 나서는데...

  에드윈 셔린(Edwin Sherin) 감독의 첫 영화 연출작인 'Valdez Is Coming(1971)'에서 발데즈는 버트 랭카스터가 맡았다. 멕시칸으로 보이기 위해 랭카스터는 피부색을 어둡게 하는 분장을 해야만 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늙고 힘 없어 보이는 마을 보안관을 연기하는 랭카스터를 보며 팬들을 물론이고 당시 비평가들도 뜨악했던 모양이다. 거기에다 이 영화에는 속시원한 총싸움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발데즈는 태너와 정면으로 대결하는데, 결국 그들은 서로를 겨눈 총을 내려놓는다. 기존의 서부극에 익숙한 영화팬들 입장에서 이 결말은 무척 맥아리 없게 여겨졌을 것이다.

  결국 죄없는 흑인을 죽인 사람은 발데즈인데, 왜 그는 그 죽음의 책임을 목장주 태너와 마을 사람들에게 묻는가? 태너는 게이 그린이라는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여자의 전남편이 살해되었는데, 그 살인 용의자로 흑인 존슨이 지목된다. 태너는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가 그 어떤 범죄의 의혹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양이 필요했다. 총잡이를 고용해 체포를 한다고 난리를 피우는 과정에서 흑인은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발데즈는 태너에게 자신이 생각한 미망인의 연금 200달러 가운데 100달러를 요구한다. 어떤 식으로든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발데즈는 태너와 그 부하 총잡이들에게 모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묶여서 사막을 걸어간다. 그 과정은 명백하게 성서 속 예수의 수난 장면과 이어져 있다. 엘모어 레너드는 소설 'Valdez Is Coming'에서 기존의 서부극에서 배제되었던 주변부 인물들을 부각시킨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흑인들은 자유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불가촉천민(outcast)'과도 같은 존재였다. 인디언들은 그들과 비슷한 처지로 백인들에게 내쫓기고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소설 속에서 백인 목장주의 윤리적 정당성을 얻기 위한 명분에 희생되는 사람은 흑인 탈영병이며, 인디언 아내는 미망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인디언 미망인의 연금을 위해 기필코 돈을 받아내려는 발데즈는 멕시칸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윤리적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오랫동안 들지 않았던 총을 든다.

  그렇다고 해서 발데즈가 매우 고결하고 도덕적인 인물인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영화 속에서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발데즈가 변모하는 순간은 그가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된 짐을 풀 때이다. 먼지가 더깨처럼 얹힌 누런 천을 벗겨내자 한 장의 사진과 총들이 나온다. 사진 속의 그는 미군 기병대 복장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아주 짧게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George Crook 장군이 이끄는 기병대의 정찰대원으로 활약했다. 크룩 장군은 인디언 전쟁에서 매우 놀라운 전적을 기록했는데, 그것은 장군이 지리에 밝은 멕시칸을 비롯해 인디언들을 정찰대원으로 썼기 때문이다. 발데즈는 그 전투에서 인디언들을 죽이는 데에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다시 그 기병대의 군복을 입은 발데즈는 태너와 부하 총잡이들 수십 명을 상대로 싸움을 선포한다. 자신을 쫓아온 하수인 총잡이를 반쯤 죽게 만들면서, 태너에게 전할 말을 일러준다.

  "Valdez is coming!"

  어쩌면 발데즈에게는 인디언들의 죽음에 대한 과거의 부채의식이 남아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채의식과 윤리적 의무감은 'Hombre'의 백인 인디언 러셀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러셀은 그라임즈와의 마지막 담판에 나선다. 돈 가방을 들고 박사의 아내와 맞바꾸기로 한 자리에서 그가 가지고 간 가방에는 돈 대신에 천뭉치가 들어있었다. 그는 결국 진정한 자신의 고향인 아파치족의 땅에 돌아가지 못한다. 왜 그는 진짜 돈 가방을 들고 가지 않았을까? 페이버 박사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과 박사가 횡령한 돈을 동족인 인디언들에게 돌려주는 것, 그 두 가지를 위해 러셀은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한다. 그렇게 백인들이 저지른 패악과 범죄의 속죄는 '인디언의 영혼을 가진 푸른 눈의 백인'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영화 'Hombre'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올라가는 사진에는 인디언처럼 보이는 소년의 모습이 있다. 그가 바로 작가 엘모어 레너드에게 영감을 준 실존 인물 지미 맥킨이다. 당시 크룩 장군 휘하의 사진사가 찍은 그 사진 속 인물 맥킨은 결국 부모에게로 돌아가서 평범한 삶을 살다 갔다. 작가의 손에 의해 재창조된 맥킨의 캐릭터는 러셀이 되었다. 폴 뉴먼은 비밀스런 과거를 지닌, 그로 인해 고통받는 러셀이란 캐릭터를 절제된 연기로 보여준다. 그의 존재 자체가 영화 'Hombre'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Hombre'와 'Valdez Is Coming'은 원작의 일부분이 생략된 서사적 빈틈에도 불구하고, 기존 서부극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또 다른 구부러진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인디언 전쟁이 끝난 1890년대의 서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영화 속 서부의 공간은 어떤 면에서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진정한 평등과 자유, 평화를 외치는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하던 시대에 엘모어 레너드는 서부 역사에서 소외된,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의 존재를 불러낸다. 그렇게 그가 새롭게 써낸 서부극 소설은 '수정주의 웨스턴'에 독특한 빛을 드리운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Hombre(1967)'의 폴 뉴먼


**사진 출처: tumbral.com   'Valdez Is Coming(1971)'의 버트 랭카스터
이 영화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주요 촬영 장소인 스페인의 남부 지방에서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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