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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에 대한 성찰, Out of the Cradle: The Origins of Humanity(2018)

 

  EBS 클래스 e에서 고인류학자 이상희 교수의 '사람의 기원' 강의를 들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은 아니고, 4강부터 들었는데 생각보다 재밌고 유익한 강의였다.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고인류학적인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계기였다고나 할까, 이상희 교수는 그 분야의 새로운 연구결과를 찬찬히 일러준다. 그런데 강의를 도와주는 보조 도구는 호미닌 화석들이 전부였다. 뭔가 자료 화면으로 한번에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나 그런 것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보게 된 다큐가 NHK에서 제작한 'Out of the Cradle; The Origins of Humanity(2018)'이다. 

  러닝 타임이 2시간 가량인데,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화면과 아주 섬세하게 재연된 초기 인류의 사냥과 생활 모습들이 흥미있게 펼쳐진다. 이런 다큐들은 보다보면 그렇다. 정말 돈이 꽤나 드는 다큐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의 기술력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텐데 제작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 싶다. 아무튼 이 다큐는 지금 시점에서 고인류학의 최신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멋지게 포장된 상자에서 선물꺼내듯이 풀어놓는다.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사람 속(Homo)의 유일한 종으로 살아남았지만, 호미닌(Hominin, 이족 보행 영장류)에는 20여 종이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440만년 전에 살았던 '라미두스(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는 화석으로 밝혀진 최초의 이족 보행 영장류로 여겨지는데, 라미두스에서 발 모양이 진화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로 이어진다. 그 이후에 등장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는 도구를 제작하고 육식을 하기 시작한다. 거기에서 나온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는 본격적인 사냥꾼의 면모를 보이며, 그들은 육식을 통해 커진 뇌와 작은 소화기관을 택함으로써 인류 진화의 신기원을 마련한다.

  다큐에서는 호모 사피엔스와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에 대해서도 아주 비중있게 다룬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보다 더 큰 뇌용량과 상대적으로 큰 체구를 가졌음에도 결국 소멸에 이른 네안데르탈인의 삶의 모습이 생생한 화면으로 펼쳐진다. 그들의 사냥 장면을 보면 네안데르탈인들이 정교한 도구 대신 육탄전으로 사냥감에 맞선 소모적인 방식이 멸종에 이른 원인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극심한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사라졌지만, 그들의 유전자는 오늘날의 인류 안에 남아있다.

  그런 네안데르탈인과 달리 현생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도구'였다. 정교하고 다양한 도구를 제작함으로써 인류는 지구 여러 곳으로 퍼져서 살 수 있었고, '인간다움'의 여러 요소를 획득해 나가게 된다. 다큐에서는 그런 도구들과 관련해서 실제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극지방에서 발견된 뼈바늘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뼈바늘은 추위를 막기 위한 털옷 제작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였다. 초기 인류가 극한의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적응하고 생존해나간 비결은 결국 '창의성'이었다.

  라미두스가 두 발로 아프리카 초원을 처음 밟기 시작한 이후로 호미닌들에게 아프리카 대륙은 안온한 요람과 같은 곳이었다. 극심한 기후변화로 사막화되어가는 그곳을 떠나 낯선 대륙으로 향해야 했던 호모 사피엔스는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해변가에서 그 요람과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그들이 두려움과 설렘, 희망과 불안을 안고서 바다를 바라보는 다큐에서의 그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 이 다큐는 인류 조상들의 삶을 복원해내면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때론 이런 과학 다큐를 통해서도 깊이있게 성찰해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docuwik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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