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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이야기, 페이튼 플레이스(Peyton Place, 1957)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는 마치 여자와 같다. 농익은, 뜨겁고 열정적이지만 변덕스러운 여자. 오직 자신이 원할 때에만 오가기 때문에 언제 올지, 얼마나 머물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그레이스 메탤리어스(Grace Metalious)가 1956년에 쓴 이 소설은 그야말로 열풍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평범해 보이는 마을 주민들의 숨겨진 비밀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이제 막 가라앉기 시작했지만, 그 즈음의 미국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소설 'Peyton Place'는 그런 답답한 미국인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청량음료처럼 느껴졌다. 불륜, 강간, 낙태, 살인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난 어느 마을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자유'를 누리는 것과도 같았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레이스 메탤리어스는 서른 살에 쓴 그 소설로 말그대로 돈방석에 앉는다.

  20세기 폭스사는 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영화로 만든다. 1957년에 마크 롭슨이 감독한 'Peyton Place'의 주연은 라나 터너(Lana Turner)가 맡았다. 매력적인 외모의 과부로 양장점을 하며 고등학생 딸을 키우는 코니 맥켄지 역이었다. 라나 터너는 뇌쇄적인 핀업 걸(pin-up girl)로 헐리우드에서 경력을 쌓았다. 외모에 비해서 딸리는 연기력은 늘 문제였다. 출연작들에서 보여준 연기력은 들쑥날쑥했으며, 복잡한 남자 관계와 사생활은 언제나 가십거리였다. 이 여배우에게 남자를 갈아치우는 일은 마치 숨쉬는 일과도 같았다. 영화로 벌어들인 돈은 썩어날 정도로 많았다. 다만 정말로 눈에 차는 남자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만난 남자가 조니 스톰파나토. 당시 로스앤젤레스를 장악한 마피아의 똘마니쯤 되는 인간이었다. 라나 터너는 이 남자를 정말로 좋아한 모양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반반한 얼굴과 보기 좋은 몸 뿐이었던 조니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Peyton Place'를 찍었을 무렵, 라나의 연인은 조니였다.

  영화 'Peyton Place'의 줄거리를 읊는 건 그다지 재미없다. 그보다는 원작자 그레이스 메탤리어스와 주연 배우 라나 터너,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인생 여정을 걸었던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흥미로울 것이다. 그 두 사람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인생을 진창길에 처박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산다는 건

  벌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 같은

  쉬운 일이 아니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 "

  그레이스와 라나, 성공한듯 보이는 두 여자에게도 삶은 쉽지 않았다. 무료한 삶을 견디기 위해 골방에 틀어박혀 썼던 소설 한 편으로 인생역전을 이룬 그레이스. 인기 여배우로 돈과 명성을 거머쥔 라나. 두 사람은 삶의 벌판길에 마주한 욕망의 구덩이에 자신을 내던진다. 그레이스는 세 명의 아이를 내팽겨치고 흥청망청 살아간다. 학교 교장이었던 남편과도 이혼한 후, 자신이 원하는 남자와 술독에 빠져 살았다. 라나의 삶도 곤경에 빠진다. 조니가 문제였다. 질투심에 미친 조니는 라나의 영국 촬영장까지 따라와서 난동을 부렸다. 당시 상대 배우였던 숀 코너리에게 총을 들고 위협했다가 오히려 얻어맞는다. 그 일은 라나에게 조니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남자 때문에 배우 경력까지 위협받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조니의 뒷배인 마피아가 라나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협박하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사건이 터진다. 1958년, 라나의 집에서 조니가 칼에 찔려 사망한다. 살인 용의자는 라나의 딸 셰릴이었다. 셰릴은 엄마와 다툰 조니가 자신을 폭행하려 해서 어쩔 수 없었다며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당시 셰릴의 나이는 14살이었다. 과연 사춘기 십대 소녀가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진짜 범인은 라나가 아닌지 사건의 실체를 두고 떠들썩할 수 밖에 없었다. 셰릴은 보호 감호 처분을 받고, 라나의 법정 증언은 최고의 연기처럼 보인다며 세간의 비아냥을 듣는다. 영화 'Peyton Place'에는 라나가 연기한 맥켄지 부인이 살인 사건 재판에서 증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쩌면 그 장면이 연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꽤나 큰 시련이었지만 라나의 배우 경력은 이어진다. 더글라스 서크 감독의 'Imitation of Life(1959)'는 라나의 명실상부한 재기작이 된다. 이후로도 영화와 TV 시리즈물에서 꾸준히 얼굴을 내비치지만, 배우로서 내리막길은 어쩔 수 없었다.

  라나 터너가 엄청난 스캔들을 견뎌낸 것과는 달리, 그레이스는 그대로 몰락한다. 서른 아홉의 나이에 지나친 음주로 인한 간경변으로 세상을 뜬다. 마지막 연인에게 남은 재산을 다 준다는 유언장을 두고 그레이스의 자녀들은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레이스에게는 남아있는 돈은 커녕 오히려 빚이 있었다. 그레이스가 서른 아홉으로 세상을 뜬 그 해 1964년, 'Peyton Place'의 TV 시리즈가 방영되기 시작했다. 1969년까지 이어진 그 시리즈 드라마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제작사인 20세기 폭스 텔레비전에 막대한 흥행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단 한 푼도 그레이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술에 절은 상태로 모든 저작권을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어느 날 깨어났을 때, 자신이 가진 모든 게 진정으로 자신이 전혀 원하지 않던 것임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레이스는 그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갑작스럽게 얻은 부와 명성으로 거침없이 욕망을 향해 스스로를 내던졌던 그레이스는 그 진창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Peyton Place'의 영화 초반부에 맥켄지 부인의 딸 앨리슨이 고교 동창 노먼과 산길을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앨리슨은 자신만이 아는 비밀의 장소라며 안내하는데, 노먼은 그 산에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 길에 있는 'Road's End'라는 팻말이 유독 내 눈길을 끌었다. 어쩌면 이 영화와 관련된 두 여자, 그레이스와 라나도 거침없이 내달린 욕망의 인생길 어디에선가 그 팻말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결코 멈출 수 없었던 그 두 사람의 삶은 쓸쓸한 말로를 보여준다.

  그렇게 'Peyton Place'는 두 여자의 절제되지 않은 욕망의 서사로 남았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억압되고 닫혀있는 미국인들의 내면에 욕망의 분출구로서 자리하게 된다. 이제 영화와 TV는 이전 시대와는 달리 성과 욕망을 대담하게 다루기 시작한다. 그레이스 메탤리어스가 자신이 살던 동네의 온갖 추문을 그러모아 창조한 Peyton Place는 어느새 미국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진 출처: nhhc.org 작가 그레이스 메탤리어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배우 라나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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