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소리를 두고 벌어진 분쟁, Sound and Fury(2000)

 

  "그건 형편없는(lousy) 결정이야!" 

  마리의 부모는 모두 농인()이다. 정상으로 태어난 마리는 결혼을 했는데, 자신의 아기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어치료사인 마리는 새로운 치료 방법인 인공와우 수술을 자신의 아들에게 해주려고 한다. 그런 마리의 결정을 부모는 이해하지 못한다. 인공와우 수술은 위험하며 그 결정이 형편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수술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 마리의 뜻은 단호하다. 남편 크리스도 마리의 결정에 찬성한다.

  크리스에게는 농인인 형이 있다. 형 피터는 농인인 부인 니타와의 사이에서 아이 셋을 두었는데, 아이들 모두 농아다. 이제 5살이 된 첫째 딸 헤더의 인공 와우 수술 여부를 두고 피터와 니타 부부도 고심한다. 피터의 부모는 손녀 헤더의 미래를 위해서 수술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터와 니타는 인공 와우 수술이 아이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라며 내켜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피터는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부모와 갈등을 겪는다. 과연 헤더는 인공 와우 수술을 받을 수 있을까?

  조쉬 애런슨 감독이 2000년에 만든 다큐 'Sound and Fury'는 인공 와우 수술을 두고 농인 가정에 일어난 갈등과 대립을 담아낸다. 당시의 미국에서 인공 와우 수술은 청각 장애에 대한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막 저변을 넓혀가던 시기였다. 다큐를 보면 그 신기술을 두고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의견이 양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공 와우를 귀에 삽입하는 침습적 수술 방식에 농인들은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낀다. 피터와 크리스 형제 가족들에게 닥친 갈등과 대립의 시작도 바로 그 수술 때문이었다. 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피터와 니타 부부는 헤더에게 수술이 필요없다고 마음을 굳힌다.

  "그건 네가 해야할 결정이 아냐. 헤더가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구!"

  헤더의 할머니는 그렇게 외친다. 그러나 피터의 뜻은 확고하다. 딸의 미래를 위해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부모인 자신이며, 자신의 결정은 수술을 해주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내 니타도 피터와 뜻이 같다. 농인의 정체성을 가지고도, 직업적 성취를 이루고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는다. 부부에게는 가족의 화합도 중요하다. 헤더가 들을 수 있게 되면 듣지 못하는 자신들에게서 멀어질 것이라며 염려한다. 부부 일심동체라는 말을 이 다큐에 나오는 피터와 니타 부부만큼 잘 보여주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동생 크리스 부부의 결정을 비난하고, 헤더의 조부모와도 극렬히 대립한다. 아이의 인공 와우 수술 문제를 두고, 이 가족은 극심한 분노와 논쟁에 휩싸인다. 

  아니, 듣지 못하는 딸에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수술을 해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지금 시점에서 이 다큐를 보는 이들은 아르티니안 가족에게 불어닥친 분노와 갈등의 광풍(fury)을 보는 것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인공 와우 수술이 지금은 표준적 치료 방법이 되었지만, 이 다큐가 만들어진 20년 전에는 획기적인 신기술로 그에 대해 의구심과 불안이 팽배했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아이의 수술 결정을 두고 벌어지는 가족 갈등은 정상인과 농인의 현실 인식,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 내부의 갈등과도 같은 여러 층위의 요인들이 겹쳐 있다. 

  "몸 속에 그런 이상한 기계를 집어넣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새로운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피터와 니타 부부는 헤더에게 수술이 필요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헤더의 할머니는 헤더에게 수술을 해주지 않기로 결정한 아들 내외를 인정할 수 없다. 맹렬히 대립하며 극심한 논쟁을 이어가던 끝에 피터는 결국 '분리'를 택한다. 피터 부부는 살던 뉴욕을 떠나 메릴랜드로 이사해 버린다. 헤더는 농아 학교에 다니게 하고, 부부는 가족과 단절된 채 그곳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다큐는 그렇게 끝나버린다. 정말 딸에게 수술 안해주고 살게 할 건가? 피터와 니타 부부의 그 완고하기 짝이 없는 믿음과 결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와 한숨을 내쉬게 만든다. 본질적으로 그들 부부는 아이가 들을 수 있게 되면 가족과 멀어질 거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아이에게 수술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보다는, 정체성의 혼란과 완벽한 정상인이 될 수 없다는 좌절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그들 부부가 못 배운 사람도 결코 아니다. 좋은 교육을 받았고, 중산층으로서 여유있는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과연 아이의 미래를 위해 어떤 중요한 선택을 해야만 할 때, 부모가 취해야할 최선의 태도는 무엇일까? 'Sound and Fury'는 청각 장애인 부모가 아이의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거기에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여러 복잡한 요인이 개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부모가 자신의 살아온 경험과 가치관에만 의지할 때 얼마나 편협하며 무모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피터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알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려 있는 마음으로 다양한 의견을 듣고 숙고하는 자세임에도 그 부부는 그렇지 못했다. 그 결과, 수술을 받고 싶어하는 헤더의 마음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었다.

  헤더는 그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감독 조쉬 애런슨은 사람들로부터 이 가족의 후일담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Sound and Fury: 6 Years later(2006)'를 만들었다. 헤더는 다큐가 나온 이후 3년 뒤인 9살 때에 인공 와우 수술을 받았다. 피터와 니타 부부는 수술을 받고 싶다는 헤더의 뜻을 받아들였고, 결국 마음을 바꿨다. 2006년에 만든 다큐에서 중학생이 된 헤더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삶 속에 새롭게 적응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수술로 변화된 딸을 보며 니타도 인공 와우 수술을 받았다. 그들 가족은 수술을 두고 벌였던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봉합했다.

  헤더는 이후 조지타운 대학과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현재는 법조인이 되기 위한 경력을 쌓아 나가고 있는 중이다. 다큐 'Sound and Fury'는 청각 장애인 가족에게 일어난 갈등의 여정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가치관과 문화적 배경의 차이가 가져올 수 있는 결정의 파장을 들여다 본다. 결국에는 소통과 이해가 분쟁을 풀어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임을 관객들은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aronsonfilms.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아, 홍상수: 물안에서(In Water, 2023)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는 승모가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