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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에 드리운 절망과 무기력의 베일, Faya Dayi(2021)

 

  Yirgacheffe. 에티오피아를 대표하는 이 고유한 풍미의 커피가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바로 기후 변화(climate change) 때문이다. 에티오피아의 커피 농부들은 맛이 없어진 커피 대신에 다른 작물을 심고 있다. Khat는 커피를 갈아엎은 땅을 빠르게 채워가는 중이다. 환각 물질을 함유한 이 나뭇잎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애용된다. 커피보다 물이 적게 들고(커피 생산에는 엄청난 물이 필요하다), 재배와 가공 과정도 간소하다. 감독 Jessica Beshir는 어린 시절, 에티오피아 내전을 피해 가족이 멕시코로 이주했고 그 뒤에 미국에 정착했다. 나중에 고국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베시르는 커피 농장이 카트로 가득찬 벌판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Faya Dayi(2021)는 카트와 에티오피아 사회의 심리 사회적 연관성을 다룬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 소설 작법에 나오는 비법 가운데 하나이다. 베시르는 에피오피아 내전과 그 후유증, 카트 산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10년에 걸쳐 촬영된 이 다큐는 어떤 면에서 감독이 바라본 고국에 대한 성찰의 편린들을 묶은 것이기도 하다. 흑백의 화면 속에 펼쳐지는 이 나라의 풍광에서 폭력과 갈등의 그림자를 찾기는 어렵다. 카트 작업장 인부들의 떠들썩한 말소리, 느긋하게 카트를 씹는 나이든 남자들, 강물에서 평화롭게 노는 아이들... 하지만 젊은이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절망이 묻어난다.

  오랜 내전(Ethiopian Civil War, 1974-1991)은 에티오피아 곳곳에 생채기를 남겼다. 2020년에 발생한 북부 티그라이 지역에서의 내전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무려 80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의 복잡한 민족 구성은 정치적 불안정과 연결되어 있다. 청년들이 나누는 대화에서는 내전에서의 폭력과 살상의 기억이 소환된다. 베시르는 내전이 할퀴고 간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내면을 시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담아낸다. 주요한 내러티브가 없지는 않다. 14살 모하메드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모하메드의 아버지는 하루종일 집안에서 카트를 씹으며 코란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카트가 떨어지면 모하메드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카트를 구해오라고 때리며 닥달을 한다. 그 모습은 여느 약물 중독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하메드는 괴로운 그곳을 떠나고 싶다. 유럽은 꿈의 땅이다. 하지만 유럽으로 향하는 길은 막대한 밀입국 비용과 목숨을 담보로 한다. 그나마 현실적인 것은 카트 밀무역상이 되어 아라비아 반도로 향하는 것이다. 고향에서 카트 중독자가 되어 절망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 아니면 밀입국을 하다가 객지에서 비명횡사하는 것. 그 모든 선택에는 불운과 고통이 수반된다.

  이슬람의 수피(Sufi) 성직자들에게 카트는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축복의 잎사귀이다. 종교 의식의 카트 연기는 신성함에 수렴되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무기력과 절망으로 귀결된다. 이미 카트에 중독된 남자는 젊은이들에게 카트를 멀리하라고 충고한다. 남자들 뿐만이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카트는 일상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필수품이 되었다.

  "모두가 카트를 씹으면서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해요."
  (Everyone chews to get away.)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모하메드는 황량한 들판을 걸으며 그렇게 읊조린다. 흑백 화면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처럼 떨어지는 모하메드의 굵은 눈물은 에티오피아가 처한 총체적 어려움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무기력과 절망이 스며든 일상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보이는 곳은 카트 가공 공장과 수매 현장이다. 베시르는 카트가 이 나라에서 커피를 밀어내고 차지한 경제적 위상을 건조한 화면 속에 담는다. 돈이 되는 신의 잎사귀는 역설적으로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을 서서히 마비시키고 있다.

  다큐의 제목 'Faya Dayi'는 건강을 기원하는 Oromo 말이다. Amhara어를 구사하는 베시르는 Oromo 농민들이 부르는 노동요에서 제목을 따왔다. 제작비의 압박 때문에 10년에 걸쳐 드문 드문 촬영했고, 그 시간 동안 다른 언어를 쓰는 주민들과 신뢰와 친분을 쌓아나갔다. 이 다큐는 에티오피아 밖의 관객들에게 그 나라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조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좁고 구불구불한 흙담벽 골목을 지나는 여인의 베일처럼 'Faya Dayi'는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미지들이 드리워져 있다. 내전이 에티오피아인들의 내면에 남긴 심리적 상흔은 '카트'와 결합하면서 사회 전체가 환각과 무기력에 잠식되어가는 중이다. 베시르는 'Faya Dayi'를 통해 오늘날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처한 심각한 사회 심리적 위기를 고요하고 밀도있는 영상 속에 담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fayaday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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