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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트보드가 알려준 희망, Minding the Gap(2018)

 

  "데니스는 어떤 사람이죠?"
  "그가 누군지 넌 잘 알고 있잖아?"
  "난 아직도 정말 모르겠어서 그래요."

  인터뷰를 위해 엄마의 집을 찾은 아들 Bing Liu는 그렇게 대화를 시작한다. 데니스는 그의 계부였다. 그는 계부가 자신을 자주 때린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엄마에게 묻는다. 이젠 다 지난 일이잖니, 엄마는 이야기를 돌리려 애쓴다. 이 다큐, 시작은 스케이트보드 신나게 타는 어린 친구들을 보여주더니 어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뭔가 심각해진다. 중국계 미국인 Bing, 백인 하층민 Zack, 흑인 Keire, 이 세 친구는 나이도 피부색도 다르지만 스케이트 보드 하나로 친구가 되었다. 다큐 'Minding the Gap(2018)'은 세 친구가 어른의 삶에 진입하면서 일어난 변화를 담는다.   

  스케이트보드로 자유롭게 거리를 질주하는 일은 즐겁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다. Zack은 여자친구 니나의 갑작스런 임신으로 덜컥 애아빠가 된다.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전전하는 Zack, 그런 변화에 적응하기가 영 쉽지 않다. Keire는 음식점 서빙일을 하며 진로를 모색하는 중이다. Bing은 14살 때부터 만져온 카메라로 자신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찍고 있다. 그 과정에서 Bing은 친구들의 상처와 마주한다. 성장 과정에서 계부의 폭력을 경험했던 Bing처럼 Zack도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고 고백한다. Keire도 마찬가지. 그들이 살고 있는 일리노이주의 도시 Rockford는 오랜 경기 침체로 낙후된 곳이다. 또한 높은 범죄율로 늘 불안과 폭력이 공존한다. 그곳에서 세 친구가 경험한 가정 폭력과 가난.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아마도 스케이트보드는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세 친구는 '남자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거멀못과 같이 내면을 옥죄고 있는 어그러진 남성성과 마주한다. Zack은 아이 아빠, 남편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심지어 니나에게 폭력을 휘두른 정황도 포착된다. Keire는 세상을 뜬 아버지가 남긴 학대의 상처와 함께 흑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것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Bing은 모친을 인터뷰하면서 가정 폭력이 남긴 어둡고 긴 그림자와 대면한다. 다큐는 마치 그 세 친구들을 위한 영상 치료 같다. 그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치유와 독립의 여정이 시작된다.

  다큐 'Minding the Gap'은 세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하층 계급 내에서 순환되는 폭력과 상처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인종 문제도 살짝 접혀져 있다. Keire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대부분의 백인 친구들과 흑인인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얼핏 내비친다. 물론 백인이라고 해서 미국 사회 주류에 모두 다 들어가는 건 아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가 'Asian Niggers, White Niggers'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그들은 함께 웃는다. 감독 Bing Liu는 다큐를 만들고 나서 Zack이 트럼프 지지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chicagotribune.com과의 인터뷰 참조). 백인 하층민,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을 가진 Zack과 같은 이들에게 트럼프의 정치적 수사학은 잘 먹혀들었다. 하층 백인들에게 유색 인종들과의 연대나 동일시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Bing Liu는 비주류 청소년들의 성장담에 '스케이트보드'라는 독특한 소재를 결합시켰다. 그 자신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면서 촬영한 영상은 Parkour(도시의 지형 지물을 이용한 신체적 이동 기술) Skateboarding의 속도감과 질주감을 선사한다. 그러한 배경 화면 속에 다큐는 제목처럼 인종과 계층, 폭력과 가난이라는 사회적 간극을 성찰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다큐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세 명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비로소 삶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아기가 제법 의젓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Zack은 니나와 아이를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린다. Keire는 덴버에서 일자리와 프로 스케이트보더로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찾았다. 그리고 Bing은 스케이트보드 말고 또 다른 곳에서 자신의 소질을 발견했다. 'Minding the Gap'은 그런 그가 카메라로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들려주는 목소리인 셈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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