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묵시적 예언서, 개의 심장(Собачье сердце, Heart of a Dog, 1988)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손뿐만이 아니라 다리도 잘라서 강물에 내던져야 한다."

  영화 '개의 심장(Heart of a Dog, 1988)'을 만든 Vladimir Bortko는 신문에 실린 평론가의 글을 읽고 깜짝 놀랐다. 작가 Mikhail Bulgakov가 1925년에 쓴 원작 소설은 소련에서 오랫동안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 고르바초프 집권기에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을 타고 공식적으로 출판이 되었다. 그 이듬해에 블라디미르 보르트코 감독은 소설을 가지고 TV 방영용 영화로 만들었다. 방영 후의 반응은 꽤 격렬했다. 저주에 가까운 혹평은 그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영화 '개의 심장'은 문학을 모범적이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영화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보르트코 감독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소련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세피아(sepia)'색의 필터를 끼워서 촬영했다. 누리끼리한 황갈색의 독특한 색감은 영화의 음울한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린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개의 시점 쇼트로 펼쳐지는 1920년대 소련의 풍경과 마주한다. 눈이 쌓인 황량한 거리에 사람들은 줄지어 서서 배급을 기다리고 있다. 1921년, 레닌은 신경제정책(NEP)을 추진한다. 1차 세계 대전에 이어 오랜 적백 내전으로 소련의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소련 인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사람이 그럴진대 개의 처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원작 소설 속에서 처음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바로 'Sharik'이라는 이름의 개이다. 샤릭은 필사적으로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는 중이다.  

  굶주린 개 샤릭은 Filipp Filippovich Preobrazhensky 박사가 건네는 소시지 한 조각에 혹해서 따라간다. 회춘 시술을 전문으로 하는 박사에게는 시커먼 속셈이 있다. 그는 샤릭을 자신의 의학 실험에 쓰려고 한다. 그렇게 박사의 아파트로 들어선 샤릭은 곧 가혹한 운명과 마주한다. 박사는 샤릭의 생식기와 뇌하수체를 제거한다. 그리고 샤릭에게 술집에서 칼에 찔려 죽은 발랄라이카 연주자 클림 추군킨의 몸에서 떼어낸 기관을 이식한다. 과연 박사가 만들어낸 괴이한 피조물 샤릭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원작 소설을 쓴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원래 직업은 의사였다. 그는 소련이란 국가의 탄생과 성장을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관점은 뒤틀리고 기이한 환상 문학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개의 심장'은 불가코프의 소련 체제 비판서나 다름없다. 검열 당국이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시 체제의 중심 구성원들이다. 7개의 방이 딸린 아파트에서 지내는 박사는 부르주아를, 거리의 개 샤릭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박사의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슈본더는 공산당을 대표한다.

  영화는 초창기 소련 체제에서 그 세 구성축이 어떻게 은밀하고도 격렬하게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부르주아의 삶을 영위하는 박사의 저녁 식탁에는 와인과 캐비어가 자리한다. 그는 우매한 민중과 그들을 조종하는 공산당에 대해 성토한다. 슈본더와 동료들의 공산당 지부에서는 장엄한 혁명가가 울려퍼진다. 그 사이에서 샤릭은 박사의 수술을 통해 개에서 조금씩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간다. 이 과정은 매우 극적이다. 짐승의 소리에 가까운 어, 으, 하는 비명을 내던 샤릭은 점차 인간의 말을 배워간다. 말을 하게 된 샤릭은 박사를 '아빠'로 불렀다가, 불같이 화를 내는 박사를 보며 '동무(comrade)'로 바꾼다. 천대받는 동물의 위치에 있었던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적 각성을 하는 순간이다.     

  개에서 사람으로, 이제 샤릭의 이름도 바뀐다. Poligraf Poligrafovich Sharikov. 샤릭이 갖게 된 이름 '폴리그라프'는 '거짓말 탐지기'를 뜻한다. 피험자의 생리적 신체 반응을 기록하는 장치. 비유적인 의미에서 샤릭의 몸은 공산주의 사상과 체제의 실험장이다. 샤리코프의 존재로 박사는 일순간에 과학계의 스타가 된다. 그와 동시에 샤리코프는 박사의 안정된 일상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노숙자들을 끌고 와서 집안에서 술을 퍼먹는다. 고양이(개였을 때 샤릭은 고양이를 싫어했다)피한다고 욕실로 숨었다가 수도꼭지를 파손시켜 박사의 집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샤리코프가 보여준 파괴적이고 저속한 행동은 박사와 조수 보르멘탈을 경악하게 만든다.

  블라디미르 보르트코 감독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면서도 자신만의 각인을 새겨넣는다. 바로 무성 영화를 활용한 장면이다. 영화의 초반부, 떠돌이개 샤릭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타이피스트 아가씨가 나온다. 이 가난한 아가씨는 틈만 나면 영화관에 가서 무성 영화를 본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이러한 장면은 민중을 현혹하는 거대한 환영(幻影)으로서의 공산주의를 암시한다. 이는 나중에 샤리코프가 공산당원이 되어 열성적으로 일하는 장면이 무성 영화로 제시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박사가 만든 괴이한 생명체 샤리코프는 이제 박사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아니, 박사가 혐오하고 경멸하는 슈본더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다. 박사는 엥겔스와 카우츠키의 서신을 읽고 있는 샤리코프를 보게 된다. 샤리코프는 더이상 개가 아니다. 단지 '말'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정치적 발화'를 할 줄 아는 존재가 된 것이다.

  '개의 심장'에서 '거울'은 의미심장한 영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개의 모습일 때의 샤릭이 보는 거울, 수술을 통해 인간 샤리코프가 된 후 바라보는 거울. 박사가 만들어낸 이 괴생명체는 개인가, 인간인가? 관객은 거울 속 존재의 내면에 자리한 다층적 면모를 목도한다. 떠돌이 개 샤릭, 범죄자 추군킨, 슈본더가 주입한 공산주의 사상, 박사가 가르치려는 부르주아적 예의범절과 허위의식... 원작자 불가코프는 공산당이 부르짖는 인간 개조의 불합리성과 허상을 샤리코프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결코 제대로 된 인간으로 기능할 수 없는 이 존재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박사는 자신을 당에 고발한 샤리코프를 원래 개의 모습으로 돌려놓기로 마음먹는다.

  영화의 초반부와 마지막 부분에는 군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눈으로 진창길이 된 거리를 행군하며 힘차게 군가를 부른다. Julius Kim이 작사한 군가의 가사는 이렇다. '백군은 완전히 패배했지만, 붉은 군대는 그 누구에게도 무너지지 않았다.' 지금의 관객에게 그 군가는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은 무너졌다. 그로부터 66년 전에 예지적 안목을 지닌 작가는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될 역사적 실험을 그렇게 글로 남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개가 된 샤리코프, 아니 샤릭은 박사의 서재에 편안하게 앉아있다. 박사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공산당원에게 프롤레타리아가 싫다고 대놓고 말했다. 그들, 부르주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사진 출처: open-foto.ru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Mikhail Bulgakov(1891-1940)

 

***'NEP' 시기 소련의 흔들리는 풍경, 파트니츠카야의 선술집(Трактир на Пятницкой, The Tavern on Pyatnitskaya, 197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nep-tavern-on-pyatnitskaya-1978.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