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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The Trials of Oscar Wilde, 1960)

 

1. 몰락의 시작

  "남색가로 처신하는 오스카 와일드에게"
  (For Oscar Wilde posing Sodomite)

  그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사건의 시작은 바로 그 짧은 메모에서부터였다. 그런 상스러운 메모를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에게 남긴 사람은 퀸즈베리 후작(Marquess of Queensberry)이었다. 그는 와일드가 아들 알프레드 더글라스(Alfred Douglas)를 유혹해서 앞길을 망치고 있다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Bosie'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퀸즈베리 후작의 셋째 아들과 와일드는 지나치게 친밀했다. 21살의 옥드퍼드 대학생 알프레드를 만났을 때의 와일드의 나이는 서른 아홉, 그로부터 4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해외 여행을 다녔고, 여러 호텔에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와일드는 작가로서 경력의 정점에 있었다. 명성과 돈이 그의 곁에서 마구 흘러다녔다. 그런 그에게 퀸즈베리 후작이 보낸 메모는 파멸의 신호탄이었다.

  켄 휴즈 감독의 1960년작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The Trials of Oscar Wilde)'은 메모 한 장으로 촉발된 재능있는 작가의 몰락을 담아낸다. 오스카 와일드는 명예훼손 혐의로 후작을 고소했다. 이후 세 번의 재판이 이어졌다. 와일드는 승소를 장담했다. 하지만 재판은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다. 첫 번째 재판에서 변호사들은 패소를 예감하고 소를 취하했다. 두 번째 재판에서 이제 그는 피고석에 서야만 했다. 젊은 남자들을 유인해 남색(男色)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죄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재판에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영화는 당시의 재판 기록과 작가의 편지에서 드러난 사실을 충실히 재현한다.

  1895년, 재판이 시작된 그 해에 와일드는 인생의 전성기를 맘껏 구가하고 있었다. 이전에 발표한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Lady Windermere's Fan, 1892)'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정직함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이 그해 초연되어 큰 호평을 받은 참이었다. 와일드에게는 아름다운 부인과 사랑스런 두 아들도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중에 감옥에서 쓴 서간집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에 그렇게 썼다. 신은 나에게 거의 모든 것을 주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그 모든 것을 누리는 작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왕세자가 그의 연극을 관람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단 한 사람, 퀸즈베리 후작은 적대감을 표시한다. 와일드(피터 핀치 분)는 그런 후작을 가볍게 무시하고, 사람들은 후작을 비웃는다. 그 장면은 이 다혈질의, 고집불통인 귀족이 사교계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는지 잘 보여준다.


2.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

  그는 아들 알프레드와 극도로 불화했다. 아들은 와일드와 헤어지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거절한다. 더이상 자신의 삶에 간섭하면 총으로 쏘아죽이겠다는 악담과 함께. 이 부자(父子)는 물과 기름처럼 화합할 수 없는 사이였다. 영화에서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알프레드의 형 프랜시스의 장례식으로 가족이 모였을 때이다. 사냥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여러 정황은 자살을 암시한다. 프랜시스는 동성애에 대한 추문에 휩싸였다. 후작은 장남을 잃은 상심이 큰 상태에서 셋째 아들 알프레드에 대한 집착이 커진다. 그는 아들을 다그치지만, 알프레드는 지독한 증오로 맞설 뿐이다. 어머니를 버리고 상간녀를 집안에 들였다며 알프레드는 후작을 비난한다.

  후작은 아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오스카 와일드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냥감을 조준하는 사냥꾼처럼 와일드를 몰아나갔다. 와일드의 집에 깡패와 함께 들이닥쳐서 난동을 부렸다. 와일드의 희곡 '정직함의 중요성'이 초연될 때에는 쓰레기 뭉치로 연극을 망쳐놓으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와일드도, 아들의 마음도 돌리지 못했다. 마침내 후작은 미끼를 던진다. 와일드가 회원으로 있는 클럽에 공개적으로 모욕의 메모를 남긴 것이다. 와일드는 자신의 명예가 손상당했다고 느꼈고, 변호사를 찾아갔다.

  와일드의 지인들은 소송이 결코 현명한 대응이 아니라고 조언했다. 그것이 불쏘시개가 되어 더 큰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와일드의 첫 동성 연인이었으며 세월이 흘러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로비 로스는 와일드를 잘 알았다. 해외로 나가서 지내라고 말했지만, 와일드는 듣지 않았다. 알프레드는 소송이 자신의 아버지를 무너뜨릴 유일한 방법이라며 와일드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결국 와일드는 젊은 연인의 편에 서서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커다락 패착임이 밝혀진다.

  영화는 첫 번째 재판에서 퀸즈베리의 변호인 카슨(제임스 메이슨 분)이 와일드를 교묘하게 몰아세우는 것을 보여준다. 카슨(그는 와일드의 트리니티 대학 동기였다)에게 오스카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오스카의 남색 기질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었다. 와일드는 문학을 평가하는 기준과 현실의 규범은 다른 것이라며 현란한 말솜씨로 카슨의 심문을 피해갔다. 피고인석에 있는 퀸즈베리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재력과 온갖 더러운 연줄을 동원해 와일드의 과거를 캐냈다. 그렇게 해서 '와일드의 남자들'이 법정에 등장했다. 변호사는 와일드에게 소를 취하할 것을 권유한다. 후작은 풀려났다. 이제 와일드가 후작이 서있던 피고인석에 서게 될 차례였다. 경찰은 와일드에게 신속하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3. 체포와 투옥,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와일드의 감옥살이는 단순히 동성애 때문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법적인 문제가 얽혀있다. 와일드의 혐의는 'gross indecency(중대한 외설 행위)'에 해당했다. 1885년에 개정된 영국 형법 11조의 항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불분명하고 모호한 죄목은 성범죄에 있어 이전까지 보호받지 못했던 어린 소년들을 보호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남색(sodomy)'을 강력하게 처벌하기 위한 조항으로 여겨졌으나, 문제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과연 무엇을 '남색'으로 규정할 것인가? 그런 법 조항 때문에 정황 증거만으로도 혐의가 인정될 수 있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이었다. 법률가들은 이 형법 조항이 피의자에 대한 '협박용'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두 번째 재판에서 검사는 오스카 와일드가 가깝게 지냈던 과거의 남자들이 20세 미만의 미성년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와일드의 젊은 시절은 분명 방탕했다. 그가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엄숙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들은 경악했다. 그들이 칭송하던 작가의 과거는 더럽고 수치스러운 범죄로 가득차 있었다. 검찰 측은 와일드를 미성년자를 꾀어서 타락하게 만든 범죄자로 몰아갔다. 사법 당국의 입장에서 와일드의 재판은 '중대한 외설 행위'를 규정한 형법 조항의 중요성을 부각시킬 본보기였다.  

  와일드에게 감옥행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막대한 보석금을 내고 겨우 풀려난 와일드에게 절친 로비 로스는 해외로 도망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와일드는 영국을 떠날 수 있는 마지막 배편을 붙잡지 않았다. 아마도 이 소송의 시작에서부터 마비된 그의 이성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마지막 세 번째 재판에서 와일드는 2년의 노역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감옥 생활은 혹독했다. 몸과 마음이 병든 것은 물론이고, 와일드는 경제적으로도 파산했다. 후작의 소송 비용까지 갚아야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 콘스탄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로 떠났다. 남편의 불명예가 두 아들의 인생을 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콘스탄스는 아이들의 성씨를 바꾸어 버렸다. 와일드는 감옥에서 지인들에게 쓴 편지에 아내에 대한 미움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콘스탄스는 아이들에 대한 친권을 포기하도록 와일드를 괴롭혔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인색하게 굴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이 받은 유산이 있음에도 아내는 와일드에게 지원을 꺼렸다. 감옥에 있던 와일드가 가장 의지한 것은 로비 로스였다. 와일드의 전 연인이 우정의 가치를 입증한 것과는 달리 젊은 연인은 그다지 한 일이 없었다. 와일드는 알프레드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그 배신감을 절절히 토로한다. 알프레드는 감옥의 와일드를 만나지도, 돈을 보내지도 않았다. 와일드에게 받은 이전의 편지들을 출판하고 싶다고 뻔뻔하게 의향을 묻기는 했다.


4. 최후

  영화는 감옥에서의 와일드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처리한다. 감옥에 있는 동안 와일드는 가장 의지하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혹독한 노동과 열악한 감옥에서의 생활로 와일드의 모든 것은 망가졌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수감 생활의 끝 무렵에서야 글을 쓰는 것이 어렵게 허용되었다. 알프레드에게 보낸 편지글 모음집인 '심연으로부터'는 그때 쓰여졌다. 그 서간들에서는 지독한 사랑 때문에 내치지 못했던 연인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연인은 심한 낭비벽에, 제멋대로였으며,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와일드를 집요하게 조종했다. 와일드는 알프레드와 퀸즈베리 후작이 자신의 인생을 망친 원흉이라며 분노를 표시한다.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은 뛰어난 작가를 파멸로 이끈 주변 인물과 재판의 과정을 간결하게 그려낸다. Peter Finch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었던 와일드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알프레드 역을 연기한 John Fraser는 정말 놀랍다. 허영과 야망, 독선으로 똘똘 뭉친 파괴적인 아도니스(Adonis)는 자신이 가진 사랑의 권력을 맘껏 휘둘렀다. 실제로 동성애자였던 프레이저는 와일드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밀어넣는 젊은 연인 알프레드 그 자체로 변모한다. 와일드의 절친 로비 로스를 연기한 Emrys Jones는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출옥한 와일드는 아내와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영국을 떠난다. 그때, 뒤늦게 도착한 알프레드가 와일드를 부른다. 하지만 와일드는 슬프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연인을 외면한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알프레드가 돌아서는 장면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나중에 알프레드는 와일드를 찾아가 잠시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들의 재결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 마지막 만남을 '쓰라린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일'이었다고 글로 남겼다. 그는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난과 병고는 그의 남은 생의 동반자였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 호텔방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뇌수막염이었다. 그는 수감 생활 중에 귀 한쪽의 청력을 잃었고, 여러 질병으로 고생했다. 결국 그렇게 상한 육신으로 와일드는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은 사랑의 종말이기도 했다. '상호합의에 의해 맺은 동성애 관계는 처벌할 수 없다.' 1967년, 와일드를 감옥으로 가게 만들었던 영국의 형법 조항은 개정되었다. 그가 세상을 뜬지 67년이나 지난 뒤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에서 John Fraser(맨 오른쪽)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오스카 와일드와 알프레드 더글라스



****영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자료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
감옥에서 쓴 서한집 '심연에서(De Profundis)': 이 책은 와일드의 절친 로비 로스가 편찬했다. 와일드는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사후 관리인으로 로스를 지정했다.

Oscar Wilde Himself(1985): BBC 제작 다큐. 이 다큐에는 퀸즈베리 후작의 증손녀와 와일드의 손자가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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