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EIDF 2022 리뷰 3: 두 개의 별(After the Rain, 2021)

 

대지진 그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두 개의 별(After the Rain, 2021)
판 지엔(Fan Jian), 104분



  그날은 비가 내렸다. 아이는 학교에 가기 싫다며 떼를 썼다. 할머니는 그런 아이를 달래어 억지로 학교에 보냈다. 그런데 그날, 천지를 뒤흔드는 엄청난 대지진이 발생했다. 학교 건물은 무너져 내렸고, 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네 언니가 죽은 그날, 나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다." 할머니는 Ranran에게 그렇게 말한다. 란란은 죽은 손녀딸의 여동생이다. 중국 정부의 엄격한 한 자녀 정책 때문에 Ying과 Ping부부는 둘째딸 란란을 시골로 보냈다. 언니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에 란란은 다시 부모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란란은 자신의 존재가 언니의 대체품으로 여겨지는 것 같아 괴롭다.

  Sheng과 Mei 부부도 대지진으로 딸을 잃었다. 중국 정부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시험관 아기 시술(IVF)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부부는 시술로 아기를 갖는 것은 실패했으나 곧 자연 임신으로 아이를 얻었다. 아들이었다. 태어날 아기가 딸이기를 열망했던 부부는 크게 실망한다. 아빠인 Sheng의 좌절감은 아들 Chuan에 대한 미움으로 이어진다. Mei 또한 아들에게 마음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추안은 어릴 적부터 자신이 죽은 누나 덕분에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자란다. 이 가정에는 냉기와 무관심이 일상처럼 자리잡는다.  

  판 지엔은 '두 개의 별(After the Rain, 2021)'에서 2008년 쓰촨성 대지진으로 어린 자식을 잃은 두 가족의 삶을 따라간다. 무려 10년이란 시간 동안 그의 카메라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재해의 트라우마를 기록한다. 죽은 자식에 대한 애도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옅어지지 않는다. Sheng은 딸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몸부림친다. 그는 마음의 고통을 술로 달랜다. 아들에게 냉랭하기 짝이 없는 Sheng은 아빠 노릇 좀 하라는 아내의 말에 역정을 낸다. 정작 아내 Mei는 Chuan이 아기 때에 여자 아이 옷을 입혀 키우기도 했다. Mei는 아들의 포동포동한 손이 죽은 딸과 똑같다고 말한다.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들이 안쓰럽지만 엄마는 그걸 해결할 방법이 없다.

  죽은 아이들은 부모의 가슴 속에서 생생히 살아있다. 다른 자식을 키운다고 해서 커다란 상처로 뚫린 마음이 메꿔지지는 않는다. 더 상황이 나빠진 경우도 있다. 어렵게 다시 얻은 아이가 장애아인 부부도 있었다. 원하는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서 괴로운 Sheng과 Mei 부부,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서먹해진 둘째딸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애쓰는 Ying과 Ping 부부. 잊을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는 아이들의 마음에도 드리워진다. 트라우마는 그렇게 세대 사이에 심리적으로 전이된다. 추안은 아버지에게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란란도 매우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한다. 그럼에도 이 소녀는 죽은 언니의 부재를 나름대로 메꾸기 위해 노력한다. 란란은 그렇게 부모를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중국 정부는 재해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아이를 갖게 하는 것을 최선의 대책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두 개의 별'은 또 다른 자녀의 존재가 재난의 상흔을 덮어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큐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지진으로 그토록 많은 아이들이 죽은 배경에는 학교의 부실 시공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부모들이 느꼈던 엄청난 상실감과 애도의 감정은 제대로 치유되지 못했다. 무너진 학교는 다른 곳에 새롭게 지어졌다. 당국은 지진에 대한 기억을 차단하고 봉인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때문에 몇몇 부모들은 성금을 모아 학교터에 추모비를 세우자는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추안과 란란이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성장 과정에 드리운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예기치 못한 대지진은 그 아이들의 삶의 궤도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이 가슴아픈 다큐는 재해가 가져다준 상실의 고통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국가는 재난을 방지하고, 그것이 일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피해를 최소화해야만 한다. 복구의 과정에는 물질적인 면 뿐만 아니라 피해 당사자들의 내면을 살피는 것도 포함된다. '두 개의 별'은 대지진이 남긴 트라우마의 긴 연대기를 통해 정부의 책임과 동시대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을 촉구한다. 



*사진 출처: eidf.co.kr




**사진 출처: brattlefilm.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