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Orange Juice, No Pulp
2편 Scion
3편 Gold Digger
*이 글은 다큐 시리즈 'The Rehearsal'의 세부 항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네이선 필더의 리허설 세계 입문: 1편 Orange Juice, No Pulp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그의 최종 학위는 학사이다. 무려 12년
동안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해온 이 남자 스키트는 어느날 문득 거짓말의 무게를 느낀다. 그래, 진실을 이야기하자. 그렇게 결심을
했지만 말을 꺼내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자신과 가장 가까운 동료 트리샤가 보여줄 반응이 가장 걱정된다. 이때 그의 어려움을
조금 덜어주겠다는 사람이 등장한다. Nathan Fielder는 스키트가 트리샤와 대면할 순간을 위해 완벽한 리허설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한다. 네이선은 스키트가 진실을 말할 장소인 동네 주점을 똑같이 세트로 만든다. 트리샤 역을 맡은 대역 배우도
뽑았다. 배우는 트리샤뿐만이 아니다. 주점의 바텐더를 비롯해 직원, 손님들도 모두 배우이다. 진짜 스키트는 가짜 건물, 가짜
손님들 사이에서 자신의 진실 고백 리허설을 시작한다.
올해 7월에 HBO 채널을 통해 방영된 다큐 시리즈 'The Rehearsal'이
미국에서 화제다. 이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의뢰자들에게 고민 해결을 위한 리허설 기회를 제공한다. 단지 상황극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리허설 과정을 총괄하는 네이선 필더는 발생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하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애쓴다. 1편 'Orange Juice, No Pulp'에서
뜻밖의 변수는 스키트가 선택한 주점에서의 퀴즈 타임이었다. 스키트는 자신이 늘상 푸는 퀴즈의 정답을 맞추지 못하면 신경이 곤두설
것 같다고 네이선에게 말한다. 그것이 스키트의 진실 고백에 영향을 줄까 우려한 네이선은 미리 진짜 주점 관계자를 만나 퀴즈
문제를 건넨다. 그리고 스키트와 자신이 산책할 때 스키트가 그 퀴즈 정답을 알아낼 수 있는 상황극을 보도록 만들었다. 물론
스키트는 네이선의 이러한 물밑 작업을 모른다.
사실 퀴즈 정답 맞추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대역
배우 트리샤의 리액션이 스키트의 현실 동료 트리샤와 비슷할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네이선은 그 부분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이려고 일종의 속임수를 기획한다. 가짜 트리샤를 진짜 트리샤와 만나도록 설정해서 거짓말에 대한 진짜 트리샤의 반응을
떠보는 것이다. 이 만남을 통해 대역 배우는 트리샤의 말투, 몸짓, 감정 표현 방식까지 알아내고 그것을 리허설에 써먹는다. 완벽한
리허설을 위한 네이선의 디테일에 대한 집착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스키트는 세트장에서 총 13번의
리허설을 거쳤다. 리허설에서 가짜 트리샤는 스키트에게 화를 내며 자리를 떴다. 마침내 다가온 스키트의 운명의 날. 실제 주점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는 스키트의 진실 고백 타임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과연 진짜 트리샤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런데 이런,
시작부터 쉽지가 않다. 리허설에서 스키트가 앉았던 자리에는 이미 다른 손님이 앉아있다. 스키트는 거짓말로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확보한다. 트리샤가 주점 안으로 들어온다. 둘은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스키트는 퀴즈 타임의 정답도 기분좋게 다 맞췄다(주도면밀한
네이선 덕분에). 리허설에서 미리 연습한 진실 고백 타이밍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하지만 스키트는 긴장과 압박으로 입을 떼지
못한다
다행히 스키트는 용기를 쥐어짜낸다. 그리고 트리샤에게 자신에 대한 진실을 털어놓는다. 네이선은 홀가분한
심정으로 귀가하는 스키트와 대면한다. 이 리허설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을까? 네이선은 스키트에게 자신이 퀴즈 문제를 미리
조작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지는 못했다. 네이선은 대역 배우 스키트와 그 부분을 리허설하면서 무척 안좋은 리액션을 받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렇게 1편 'Orange Juice, No Pulp'가 끝난다. 그 제목은 의뢰자 스키트가 오렌지 주스를 주문할 때
하는 말에서 따왔다.
이 흥미롭고 놀라운 다큐는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타인은 어떠한가? 거짓말은 반드시 배척해야만 하는 것인가? 만약 용인될 수 있다면
어떠한 목적에서, 어느 정도의 선이 적당한가? 네이선이 설계한 리허설의 세계는 의뢰자만 빼놓고 모든 것이 '가짜'이다. 리허설이
아무 문제없이 굴러가더라도 그것이 진짜 현실의 세계로 들어오면 달라진다. 그러므로 네이선은 발생 가능한 상황의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 애를 쓴다. 1편에서 네이선의 시도는 성공적이었을까? 그는 진실을 말하게 될 스키트의 내적 감정과 압박감을 고려하지 않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제 이 완벽주의자 리허설 설계자는 2편의 의뢰자와 새로운 작업을 시작한다.
2. 네이선, 리허설의 주인공이 되다: 2편 Scion, 3편 Gold Digger
2편의 의뢰자는 44살의 안젤라이다. 안젤라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아이를 낳을 생각이다. 하지만 양육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 안젤라의 바람은 이러하다. 아기때부터 십 대 청소년에 이르기까지의 자녀 양육 과정을 단기간 내에 체험해
보는 것. 거기에는 안젤라가 원하는 양육 환경에 대한 세세한 요구 사항도 들어간다. 도시 근교에 텃밭을 일구면서 자연과 가까이
지내는 삶. 네이선은 안젤라의 리허설을 위해 오리건 근교의 주택을 빌린다. 실제 텃밭도 만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
역할을 맡을 대역 배우들의 채용이었다. 오리건의 주법은 아동이 4시간 이상 상업적 작업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러므로
네이선은 4시간마다 아기 배우들을 교체해야 했다. 밤에는 로봇 아기 인형으로 대체하고 그 인형에서 우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안젤라와 공동으로 양육을 하게 될 남자도 있어야 했다. 안젤라가 데이트 앱으로 만난 젊은 남자 로빈이 그렇게 리허설에
들어온다.
그런데 로빈은 리허설을 시작한지 몇 시간만에 그만 두고 가버린다. 그는 야간에 울도록 설정된 로봇
아기의 울음소리를 견디지 못했다. 양육자 없이 리허설을 계속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네이선은 안젤라와 합의하에
자신이 아빠 역할을 맡기로 한다. 리허설 설계자는 그렇게 자신도 리허설의 세계 안으로 밀어넣는다. 그 역할은 네이선에게도 낯설다.
독신인 그는 아빠가 되어본 적이 한번도 없다. 자신과 다른 종교적 배경을 지닌 양육자 안젤라와도 협력해야 한다. 할로윈을 사탄을
찬미하는 행사로 여기는 안젤라를 인정하는 일은 그에게도 버겁다. 아이와 함께 모처럼 기획한 할로윈 행사는 안젤라의 반대로
썰렁하게 끝난다.
그 와중에 아들 Adam역의 아역 배우들도 계속 바뀐다. 안젤라는 아기에서 훌쩍 자라버린 아담을
네이선에게 인사시키는데, 아담은 누군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한다. 이 웃지못할 리허설은 네이선의 실제 현실과 겹쳐지며
이어진다. 그 집에서 네이선은 출퇴근을 하며 지낸다. 그리고 의뢰인 패트릭을 위한 새로운 리허설을 구상하고 진행시킨다. 3편
Gold Digger(남자의 돈을 보고 접근하는 여자를 의미함)편의 패트릭의 고민은 이렇다. 세상을 뜬 조부는 유산 집행인으로
패트릭의 형을 지정했다. 조부는 패트릭이 gold digger와 같은 여성과 결혼하면 유산을 줄 수 없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런데
패트릭의 형은 패트릭이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가 돈만 밝힌다며 유산을 주길 거부하고 있다. 패트릭은 형을 설득하고 싶어한다.
네이선은 2편과 3편에서 자신이 리허설에서 간과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음을 자각한다. 아무리 현실을 완벽하게 복제하려고 애를 써도 리허설이 쉽게 살려내지 못하는 것이 '감정(feeling)'이다.
과연 패트릭은 형 역할을 연기할 대역 배우 아이작을 진짜 형으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것은 네이선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안젤라와의 리허설에서 네이선은 아기 돌보기는 그럭저럭 해내지만 진짜 '아기 아빠'라는 느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네이선은 패트릭을 위한 또 다른 상황극을 구상해낸다. 아이작의 가짜 할아버지를 설정하고 패트릭이 그 가짜 할아버지 배우와 인간적
유대감을 쌓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패트릭은 아이작과 그 조부의 관계가 가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패트릭은 아이작의 할아버지가
숨겨놓은 작은 금상자를 찾는 과정을 돕는다. 그리고 철저한 리허설 설계자 네이선은 가짜 조부의 죽음을 패트릭에게 통보한다.
그런 와중에 실행된 패트릭의 리허설은 어떻게 끝났을까? 그는 한 번의 리허설을 끝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리허설 준비 초반에
네이선은 패트릭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형에게서 단지 할아버지의 유산을 받아내려는 것인지, 자신의 여자
친구를 형이 인정해주길 바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짜 형 아이작과의 단 한 번의 리허설을 통해 패트릭은
진심을 내보이며 형제간의 유대를 새롭게 한다. 어떤 이에게는 '리허설'과 같은 조작된 가공의 현실 체험이 매우 강력한 자기 성찰의
도구가 된다. 패트릭의 경우는 그 점을 입증한다. 네이선은 그런 패트릭의 모습을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바라본다.
패트릭과는 달리 네이선은 안젤라와의 양육 리허설에서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 '아기 아빠'의 감정 딜레마에 빠져있다. 식탁에
앉아있던 네이선은 채소 손질을 하고 있는 안젤라를 바라본다. 안젤라가 텃밭에서 수확한 파프리카에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그것은 촬영
스태프들이 마트에서 사온 채소들을 밤중에 미리 텃밭에다 묻어둔 것이다. 네이선은 얼른 일어나 파프리카의 가격표가 보이지 않도록
돌려놓는다. 네이선은 리허설 속 진짜와 가짜 사이의 힘겨운 줄타기에서 무엇을 발견할까? 남아있는 3편의 에피소드는 그에 대한 답을
줄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vulture.com 리허설 3편의 네이선 필더(사진 가운데). 그는 노트북을 저렇게 엿장수처럼 들러메고 리허설 준비 과정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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