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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입 속을 들여다 보다, 미시마-그의 인생(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 1985)

  

  미스미 켄지 감독의 '검(劍, 1964)' 리뷰를 쓰면서 '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 생각이 났다. '검'은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문학을 좋아하고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이 가진 작품성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극우적인 가치관과 생의 마지막에 택한 끔찍한 죽음의 방식은 이 작가를 언급할 때 어떤 면에서는 흠칫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전집이 나오지 않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의 초기작인 '가면의 고백'과 '금각사', '파도 소리' 정도가 번역되었다. 민음사에서 미번역된 미시마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내놓을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폴 슈레이더의 '미시마-그의 인생(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 1985)'은 4개의 장으로 나누어 미시마 유키오의 생애를 조망한다.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된 사건은 역시 '미시마 사건'으로 알려진 자위대 점거 할복 자살 사건이다. 영화를 4부분으로 분할한 것은 사실 그다지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일부분을 영화적으로 재연해서 보여주는데, '금각사', '교코의 집', '달리는 말'이 나온다. 젊은 청춘 4명의 욕망의 행로를 그린 '교코의 집'과 극우적 사상이 드러난 '달리는 말'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시오카 에이코가 맡은 미술 세트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면서도 매우 화려한 색감으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음악은 그 유명한 현대 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가 맡았다. 폴 슈레이더는 그렇게 관객의 눈과 귀를 장악해나가면서도 본질인 미시마의 생애를 냉정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주인공이 논란 그 자체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 이 영화가 가져올 파장을 최소화하고 싶어한 것처럼 보인다.    

  '미시마-그의 인생'이 보여준 영화적 성취와 객관성은 찬사받을 만하다. 각본은 감독 폴 슈레이더와 그의 동생 레너드가 맡았는데, 레너드는 오랜 일본 생활을 통해 나름의 현지 정서에 익숙했다. 또한 그의 부인 치에코는 영어 대본을 일본어로 옮기는 작업을 맡음으로써 영화의 완성도에 기여했다. 제작비를 마련해준 미국 제작자들(코폴라와 루카스)과 미국인 감독, 일본어로 연기하는 일본 배우들, 일본인 세트 디자이너, 일본 현지 촬영이라는 다소 이색적인 조합은 놀라운 시너지를 만들어 낸다. 폴 슈레이더에게 이 작품은 자신이 각본을 쓴 '성난 황소(1980)'와 더불어 말 그대로 인생작으로 남았다. 뭔가 그가 가진 재능의 총합을 다 보여준 느낌이다. 

  미시마 역을 맡은 오가타 켄의 연기도 아주 좋다. 원래 그 역은 다카쿠라 켄에게 제안이 갔지만, 그는 극우파의 위협에 출연을 고사했다. 이 영화는 공식적으로 일본에서 상영된 적이 없는데, 그 배경에는 미시마의 유족과 극우파의 반대가 자리하고 있다. 극우파는 자신들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미시마를 동성애자로 그렸다는 점을 참을 수 없어한다. 어쨌든 폴 슈레이더는 지뢰 피해가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절제된 균형 감각을 가지고 이 논란덩어리 인물을 영화적으로 부활시킨다.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슈레이더는 왜 미시마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시작은 감독 자신의 개인적 관심에서였을 것이다. 사실, 미시마 유키오란 인물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의문과 궁금증을 남긴다. 그가 쓴 소설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그 정치적 변신의 여정과 함께 끔찍하고 참혹한,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죽음까지 모든 것이 그렇다. 나는 미시마 유키오를 떠올릴 때면 어떤 '괴물'의 형상을 상상해 보곤 한다. 어떻게 그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인 글을 써내려갔던 작가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추한 모습의 괴물로 변해버린 것일까?

  괴물을 대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피해서 도망가든가, 아니면 괴물의 주위를 맴돌면서 괴물과 직면할 방법을 찾아보든가. 괴물과 마주하는 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대적하기로 결심한 이들은 괴물에게 잡아먹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에게 그 모험과 도전은 가치있다. 괴물의 실체를 알아낸다면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고 괴물과 함께 공존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폴 슈레이더는 관객에게 괴물의 입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관객은 그 커다랗고 컴컴한 입구에서 뛰어난 재능의 작가와 그가 쓴 작품, 그의 시대를 조심스럽게 가늠해 본다. 어쩌면 이 탐험은 이제 시작이며, 슈레이더처럼 누군가는 자신만의 영화적 방법으로 그 여정의 기록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리뷰를 쓰고 나서 미시마 유키오와 관련된 자료를 다시 찾아 보니, 와카마츠 코지 감독이 '11・25 자결의 날, 미시마 유키오와 젊은이들(2012)'를 남겼다. 극영화로 미시마 유키오의 생의 후반기 5년의 여정을 담은 영화라고 한다.  

**사진 출처: film-gra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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