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영화 매체들이 상반기에 뽑은 추천작들 순위에 이 영화가 꼭 들어있다. 제목도 희한한 영화 'RRR(2022)'은
인도 영화이다. 인도 영화하면 흔히 떠올리는 춤과 노래로 범벅이 된 3시간짜리 영화를 떠올리면 오산이다. 인도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RRR'은 이제까지의 인도 영화 최고 흥행기록도 경신했다. 영화는 인도 국내에서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다. 도대체 이 영화에 무슨 마력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1920년대의 인도. 영국 관료 스콧과 그의 부인 캐서린은 곤드 부족를 방문한다. 캐서린은
'말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이유로 납치한다. 그 일에 분노한 부족의 전사 빔은 말리를 구출하기 위해 델리로
떠난다. 한편 제국 경찰로 복무하는 인도인 라주는 출세를 위해 동족들을 탄압하는 데에 앞장선다. 빔과 라주는 죽을 위험에 처한
소년을 함께 구하게 되면서 우정을 쌓아간다. 아직까지 서로의 진짜 정체를 알지 못하는 두 남자. 하지만 말리를 구하려던 빔을
라주가 체포하면서 둘의 우정은 깨어질 위기에 처한다. 결국 사형이 확정된 빔, 라주는 뜻밖에도 빔을 살려주고 그 일로 라주는
투옥된다. 라주 덕분에 말리와 함께 탈출할 수 있었던 빔은 우연히 라주의 여동생 시타를 만나게 된다. 시타로부터 라주의 과거를
듣게된 그는 라주를 구하기 위해 감옥에 잠입하는데...
감독 S. S. Rajamouli는 실존했던 인도 독립의 영웅 두 사람을 빔과 라주로 형상화했다. 현실에서는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인도 독립 투사들은 영화 속에서 둘도 없는 친구로 나온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신화적 서사를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라주는 인도 신화의 라마(Rama), 빔은 비마(Bhima)신의 특성을 지닌다. 빔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 라주는 제국 경찰을 공격한다. 놀랍게도 그가 사용하는 무기는 총이 아니라 '활(!!!)'이다.
그는 오로지 활쏘기만으로 일당백의 무력을 발휘한다. 신화 속에서 라마신은 숲의 지배자로 늘 활을 들고 다닌다. 빔이 보여주는
천하무적의 힘은 비마신의 무력과 통한다. 역사 속 인도의 독립 투사는 인간을 넘어선 신화 속 영웅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RRR'은 인도 관객들에게 시쳇말로 '국뽕'이라 부르는 애국심을 맹렬하게 자극한다. 영국 관료와 영국인들은 악마화된 모습으로
묘사된다. 스콧과 캐서린은 잔혹한 인물들로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하다. 영화의 두 주인공 빔과 라주가 거기에 맞서는 방식은
지극히 인도적이다. 인도인들에게는 영국의 총칼을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무수한 신들'이 있다. 영화는 인도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신화 속 이야기를 차용해서 종교적인 감성을 극대화한다. 이 영화의 곳곳에는 오늘날 인도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민족'과 '종교'라는 거대 이데올로기가 단단한 뿌리처럼 엉켜있다.
현재 인도의 국가 수반 나렌드라 모디는 힌두 민족주의(Hindi Nationalism)를 내세우며 집권했다. 인도에서 힌두 원리주의와 결합한 배타적 민족주의는
타종교, 특히 이슬람과의 분란을 격화시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 'RRR'의 서사는 인도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인도인의
정체성을 환기시킨다. 이 영화가 인도에서 초대박 흥행 성공작이 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서양
관객들, 특히 미국에서 'RRR'의 영화적 감수성이 먹혀들었다는 점은 나에게 무척 흥미롭게 다가온다. 나름 까탈스러운 미국의 영화
비평 매체들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평을 써놓았다. 정말로 그들에게는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것이다. 헐리우드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MCU)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빔과 라주는 이국적 영웅으로 여겨졌을 법도 하다.
'RRR'이 거둔 엄청난 상업적 성공과는 별개로 이 영화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소비되는 양상은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서구의 관객들은 'RRR'이 지닌 인도 현실 정치의 맥락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마도 때깔 좋은 인도 액션 시대극 한 편을 3시간
동안 즐겁게 감상했다고 여길 것이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서사는 더 가깝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영화 속 인도와
영국의 관계는 일제 치하의 조선과 일본을 떠올리게 만든다. 빔은 독립투사, 라주는 일제 앞잡이 조선인 순사로 치환된다. 그렇게
식민 지배의 기억을 지닌 제 3세계 국가들의 관객들은 'RRR'의 시대극 감성에 물든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 낯선 Tollywood 영화(Telguru어로 제작된 인도 영화)는 인도라는 국가를 넘어(Rise), 전 세계 관객들을 향해 포효하며(Roar), 인도 영화 수출의 혁명적 발판(Revolt)을 만들어 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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