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분의 법칙. 언젠가 읽은 시나리오 작법 책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20분 안에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야 한다'. Sony Picutres의 2021년작 애니메이션 영화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The Mitchells vs. the Machines, 2021)'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기준을 살짝 넘어간다. 20분이 지나도록 이 애니메이션은 좀 심심하다. 미첼 가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로 그 중요한 20분을 흘려 보낸다. 그러다 23분이 될 때에 갑자기 사건이 터진다. AI(인공 지능) 로봇이 인간을
공격한다. 그렇다. 이 애니메이션은 제목 그대로 AI 로봇 군단에 맞서는 미첼 가족의 좌충우돌 모험담이다.
애니메이션의 도입부는 딸 케이티와 아빠 릭의 소원해진 사이를 부각시킨다. 영상물 제작을 좋아하는 케이티는 영화 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케이티는 가족이 자신의 결정을 지지해주길 원한다. 하지만 아빠는 영화로 어떻게 먹고 살 거냐고 물으며 케이티를
실망시킨다. 상심한 딸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릭은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대륙 횡단 여행을 계획한다. 케이티는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여행에 동참한다. 한편 기업가 마크 보우먼은 새로운 로봇 라인을 발표한다. 그런데 발표회장에서 반란을 일으킨
로봇들은 인간들을 마구 공격하고 포획한다. 그 시간, 공룡 테마 파크에 머물고 있던 미첼 가족은 로봇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는다. 아빠 릭, 엄마 린다, 딸 케이티, 아들 애런. 초능력자도 아닌 이 평범한 미첼 가족은 로봇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내러티브의 한 축은 미첼 가족 내부의 갈등으로 이루어진다. 또 다른 한 축은 로봇 군단을 이끄는 우두머리 AI PAL과 미첼
가족과의 대결이 차지한다. 복잡하게 꼬인 가족 모험 서사의 종착지는 당연히 로봇 군단의 패배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말에 이르면
관객은 이 애니메이션의 진정한 주제는 결국 '가족주의'임을 알게 된다. 어떻게 미첼 가족은 영리하고 무지막지한 로봇들을 무찌를 수
있었을까? '엄마가 너를 지켜줄게!' 엄마 린다는 로봇들에게 붙잡힌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무한 능력의 여전사로 변모한다. 모성애는 그 어떤 것도 파괴시킬 수 있는 절대 반지급의 능력이 된다. 아빠 릭은 혼돈과 파괴의 전장에서 딸과의 소중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멀어진 부녀 사이를 복원하기 위해 애쓴다.
결국 눈물겨운 가족애는 미첼 가족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인류를 로봇들의 마수에서 구해낸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서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가족주의'가
다가올 AI를 비롯해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필요한 가치인가? 아니, 그것은 인류가 처한 여러 어려움에 대한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로봇 군단과 맞서는 가족 모험 서사의 틀을 갖추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공 지능과 인류의 미래'라는 중요한 명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AI 로봇 회사의 수장 마크 보우먼은 Meta의 CEO 마크 주커버그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마크 보우먼은 청바지 차림에 야구 모자를 쓰고 새로운 로봇 라인을 프레젠테이션한다.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신제품을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은 스티브 잡스에서부터 시작된 실리콘밸리 IT 기업의 전통이 된지 오래이다.
첨단 기술 혁명은 인류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다. 새로운 AI 로봇을 소개하는 CEO 마크는 로봇이 사람들의
삶에 가져다줄 편안함을 강조하지만, 이는 곧 재앙으로 뒤바뀐다. 그것을 만들어낸 마크를 비롯해 그 누구도 AI 로봇을 통제하지
못한다.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게 된 인공 지능과 인류가 공존하는 미래가 결코 장밋빛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개발자들은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AI 로봇에게 많은 능력을 부여하고 있지만, AI의 판단은 인간이 전부 다 알 수 없는 블랙 박스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진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로봇 군단의 우두머리 AI PAL은 인간을 포획해서 멸절에 이르게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미첼 가족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셜 네트워크와 단절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미첼 가족은 함께 모인 식탁에서도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다. '연결'이라는 허울좋은 미명의 네트워크는 오히려 가족을 비롯해 현실의 인간 관계에서 개인을
소외시킨다. 미첼 가족은 기계적 가상 연결망이 파괴된 상황에서 비로소 서로를 바라보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분열된 가족은
위기 상황에서 하나로 뭉친다. 더 나아가 미첼 가족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인류를 로봇 군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하지만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가족주의'는 AI 시대의 근원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하는 지점은 '인간에게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인공 지능 로봇들을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기능할 수 있는 AI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느냐'가
될 것이다. 물론 미첼 가족은 기계 전쟁에서 승리했다. 로봇 군단과 그들의 가모장(家母長, 애니메이션 속에서 목소리를 담당한
이는 배우 올리비아 콜먼이다)은 파괴되었다. 가족은 평화로운 현실로 복귀했다. 그렇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역설적으로 다른 형태의
AI PAL과 로봇 군단이 등장하는 미래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인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러닝
타임 114분을 순식간에 보내고 난 뒤에 내 머릿속에는 그렇게 무겁고도 어려운 질문이 남았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