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백화점에서 잠깐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어떻게 하다 들어간 곳이 아주 길고 좁은 복도였다. 유니폼을 입은
여점원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벽에 등을 기대어 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곳은 직원들의 휴게실
같은 곳이었다. 화려한 백화점의 가려진 곳에는 그런 공간이 있었다. Philip Barantini의 영화 'Boiling Point(2021)'는
관객을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 뒷편으로 안내한다. 거기에는 고성과 비난, 연민과 격려, 분노와 짜증이 공존한다.
앤디(Stephen Graham 분)는 런던의 고급 레스토랑의 수석 셰프이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관청의 위생 담당 검사관에게 화가
치미는 소식을 듣는다. 검사관은 주방의 위생 상태 불량으로 안전 등급이 별 5개에서 3개로 강등되었다고 통보한다. 분노한 앤디는
주방 요리사들을 혹독하게 질책한다. 부주방장 칼리는 재빨리 분위기를 수습해서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
손님들이 몰려들고 주방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과연 레스토랑 Jones & Sons의 직원들은 이 날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감독 필립 바랜티니는 이 영화를 싱글 테이크(a single take), 즉 하나의 쇼트로 찍었다. 무려 92분 동안 카메라는
끊기지 않고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간다. 이러한 촬영 방식이 주는 긴장감은 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보일링 포인트'는
마치 리얼 타임 고급 레스토랑 탐험기 같다. 영화는 앤디의 출근길에서부터 시작된다. 계속해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앤디의
목소리와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이 사람은 무언가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검사관으로부터 받은 불쾌한 통보, 신참
요리사들의 실수, 거기에 레스토랑 매니저는 예약 손님을 너무 많이 받아놓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앤디를 진정시키는 것은
부주방장 칼리. 차분하고 이성적인 칼리는 앤디를 대신해 주방 직원들을 다독인다. 그런데 이 레스토랑의 문제는 주방에서만 터지지
않는다. 매니저 베스와 서빙 직원들은 진상 고객들을 상대해야 한다.
인플루언서(influencer) 고객은 메뉴에도 없는 스테이크를 해달라고 하고, 인종차별적인 백인 고객은 서빙하는 흑인 직원에게
적대적 감정을 표출한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여성 손님들은 남자 직원에게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레스토랑 직원들의 유사 가족적인 연대감이다. 그들은 손님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동료들과 나누며 감정을 누그러뜨린다. 이것은
앤디가 이끄는 주방에서도 동일하다. 요리사들의 실수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기는 했지만, 앤디는 그들과 자신이 한 팀이라는 것을 잘
안다. 수석 셰프의 자리는 군림하고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방의 모든 일에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설거지를 담당하는 여자
직원은 게으름을 피우는 불성실한 동료에 대해 앤디에게 하소연한다. 이 여성의 서툰 영어 억양은 현재 영국에서 비숙련 저임금
노동을 떠맡고 있는 동유럽 이주 노동자들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앤디는 직원의 불평불만이 주방을 마비시키지 않도록 세심하게
처리해야만 한다.
앤디가 수석 셰프로서 보여주는 책임감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문제들은 그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동업자였던 셰프는 음식 평론가
애인을 레스토랑에 데려온다. 그는 앤디에게 빚독촉을 하며 심리적인 압박을 가한다. 힘든 것은 앤디 뿐만이 아니다. 매니저 베스는
손님들의 무리한 요구를 주방에 그대로 떠넘긴다. 부주방장 칼리는 베스가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주방 직원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붓는다. 아버지의 레스토랑을 잘 꾸려가고 싶은 베스는 자신의 역량 부족을 탓하며 화장실에서 눈물을 쥐어짠다. 칼리는
과도하게 밀려드는 주문과 다혈질 주방장 앤디를 보조하느라 진이 다 빠진다. 디저트를 담당하는 요리사의 팔에 난 자해 흔적은 그의
불안정한 내면을 보여준다. 그 상처를 발견한 동료가 그를 따뜻하게 포옹하는 감동적인 순간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보일링
포인트'의 등장인물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에 노출되어 있다. 주방에서 끓어 넘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삶의 모든 문제와 감정들이다.
영화 속에서 앤디는 흰색 텀블러에 든 음료를 수시로 들이킨다. 주방의 열기가 그를 목마르게 하는 것일까? 관객은 영화의 끝부분에
가서야 그가 텀블러에 들이붓는 것이 '보드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방은 결코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불행한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을 먹는 이들이 과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보일링 포인트'는 고급 식문화 산업에 조소(嘲笑)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려내는 근원적 풍경은 사유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가? 우리가 그것을 위해 지불하는 댓가는 합당한가? 감독 필립 바랜티니는 그 이면에 자리한 자본주의가 노동 현장에서 침탈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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