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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자의 기억 속으로, The Act of Killing(2012)

  

  "그건 사고였어. 내가 무서워서 실수로 널 때렸단다."

  늙은 남자는 실수로 오리를 다치게 만든 손주에게 오리에게 할 말을 일러준다. 어린 오리 새끼는 다리를 절며 돌아다닌다. 만약 그 대상이 오리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 남자는 젊은 시절 준군사 조직의 행동 대장으로 자신의 기억으로는 10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사람이다. 그야말로 '학살자'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밖에 없는 인간이다. 안와르 콩고(Anwar Congo), 이것이 그의 이름이다. Joshua Oppenheimer의 2012년 다큐 'The Act of Killing'은 금세기에 가장 덜 알려진 어떤 학살의 기억을 복구해 나간다.

  이 다큐는 무려 2시간 40분에 이르는 러닝 타임을 갖고 있다(감독판). 나는 긴 시간 때문에도 그랬지만, 다큐가 다루는 그 무거운 이야기 때문에 거의 7년의 시간을 그냥 안보고 있었다. 어떤 실제적인 사건을 다루는 영화는 보는 이의 진을 다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아마도 이 작품도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이 다큐를 보려는 이들은 되도록이면 빈속에 보아야 하며, 무언가 먹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다. 욕지기와 함께 내내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가장 덜 알려진 학살 사건. 1965년과 6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 사건이었다. 1965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를 쿠데타로 몰아낸 수하르토는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다.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서 무차별적이고 잔혹한 범죄 행위들이 자행되었고, 그 결과 목숨을 잃은 피해자만 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무고한 양민들과 중국인이었으며 그 학살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준군사 조직 판카실라는 공식적으로 그 어떤 조사나 처벌도 받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판카실라는 유력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온갖 더러운 사업과 범죄에 연관되어 있다.

  다큐의 초반부에 안와르 콩고와 그의 수하였던 아디가 아주 유쾌하게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떠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을 가장 쉽고 편하게 죽이는 방법을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고 배웠다는 이야기부터, 자신이 철사로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지도 웃으면서 재연한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양심의 거리낌도 없어 보인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안와르와 아디에게 그들의 과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그들은 흔쾌히 승락했다. 다큐의 제목 'The Act of Killing(인도네시아어 제목 Jagal: 도살자)'는 그렇게 만들어 졌다.

  안와르와 아디는 그 학살에 동참했던 과거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재회한다. 그들에게 학살의 기억은 끔찍하고 참혹한 것이 아니라 웃으며 떠들 수 있는 이야깃거리다. 당시에 영화관을 끼고 암표장사를 하던 그들은 사업을 소유한 중국인들이 미국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게 하자 앙심을 품었다. 마침 수하르토의 쿠데타가 터졌고, 그들은 돈과 권력을 위해 거리낌없이 학살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대적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범죄는 인생의 새로운 발판이 되어서 지역 유지, 사업가, 정치가가 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피해자들의 가족들은 모두 숨죽이며 입을 틀어막고 살아야 했다.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영화로 만든다는 사실에 신나고 들뜬 그들은 의상이며 소품을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기도 하고, 보조 출연을 할 동네 주민들도 모집하러 다닌다. 그 주민들 가운데에는 그들에 의해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학살자와 피해자들은 함께 영화를 촬영한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한 그들의 촬영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뭔가 불안스러운 흔들림과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숲 속에서 이루어진 방화와 살인, 강간의 촬영 장면에서 안와르의 표정은 어둡고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단지 짧은 재연 장면이었음에도 촬영에 참가한 동네의 중년 부인은 넋이 나가 버린다. 촬영이 끝나고도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서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학살자 아디의 딸도 있다.

  "솔직히 후회되는데, 이 장면이 이렇게 끔찍할 줄 몰랐어요. 친구들은 나에게 더 가학적으로 해야한다고 하는데, 저 여자애들과 어린애들을 보니까... 평생 우리를 저주하지 않겠어요?"

  안와르는 그렇게 학살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나간다. 자신이 행한 고문과 온갖 살인의 방법들을 재현하는 그의 얼굴은 고통과 공포, 회한으로 일그러진다. 다큐의 마지막에 그는 자신과 조직원들이 사람을 죽인 건물의 옥상을 둘러 보며 구토를 참지 못한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그곳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가는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학살자의 내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그에게 끔찍한 범죄의 과거는 지나갔으며, 그가 그곳을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학살자 안와르 콩고는 2019년 10월 25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자신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다큐 이후에도 지역의 여러 범죄 사업에 연루된 삶을 살았다. 

  "글쎄, 안와르와 나 사이의 유대감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우정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다만 난 그가 좀 마음에 걸려요."(theguardian.com과의 2013년 6월 20일 인터뷰)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다큐 제작 이후로도 안와르와 지속적으로 연락했다. 오펜하이머가 안와르와 맺은 인간적 관계와 어떤 신뢰가 없었다면 이 다큐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안와르는 감독을 '조슈아'라고 친구처럼 부르며, 아주 가감없이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 보인다.

  'The Act of Killing'을 통해 관객은 학살자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학살자들이 스스로 배우가 되어 자신의 범죄를 '재연'하는 이 기이하고 낯선 방법은 어떤 면에서는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한편으로는 이 다큐가 부각시킨 역사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들과 생존자들은 가해자들의 입장만을 다룬 것이라는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래서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2014년에 '침묵의 시선(Senyap, The Look of Silence)'를 만든다. '침묵'이라는 뜻의 인도네시아어 제목의 다큐 'Senyap'은 아버지를 학살로 잃은 아들이 가해자들을 만나는 여정을 담아냈다. 나는 아마도 그 다큐를 보기까지 꽤 오랫동안 망설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통스럽고 괴로운 감정에 휩싸이게 만드는 영화를 보는 이들은 누구나 그것을 삭혀내기까지 나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사진 출처: documenta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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