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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쉼표같은 고흐 이야기, At Eternity's Gate(2018)

  

  "화가들은 당신처럼 다 미쳤소?"

  "나도 잘 모릅니다. 아마 뛰어난 화가들은 그럴지도."

  요양원에서 만난 전직 군인과 고흐는 그런 대화를 나눈다. Julian Schnabel의 2018년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는 고흐가 죽기 전에 체류했던 아를과 오베르에서의 행적을 그린다. 고흐 역으로는 배우 윌럼 더포가 열연했는데, 이 연기로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정말로 상 받을만한 연기였다.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고흐의 모습은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 화가이다.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 병원에 갇히기도 하고, 결국은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한 온갖 불행의 총합 같은 인생. 그러나 그의 신화는 죽음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가를 알아보는 이들이 늘어났고, 그는 현대 미술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피카소를 넘어서는 불멸의 화가로 남았다. Vincente Minnelli 감독의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 1956)'에서는 커크 더글러스가 고흐 역, 앤소니 퀸이 고갱으로 나온다. 그 영화는 어쩌면 고흐에 대한 가장 평이하고도 무난한 초상을 그려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고흐의 잘 알려진 인생 여정을 따라가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감독 줄리언 슈나벨은 관객들에게 고흐라는 화가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에 촛점을 둔다. 우울과 광기,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고흐의 혼돈스러운 마음의 풍경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를 따라간다. 그러한 실험 영화적 시도는 시각적 피로를 가중시킨다. 정지된 쇼트들이 거의 없으며, 한마디로 미친 듯이 춤추는 쇼트들이 이어진다. 마치 '광기 어린 화가의 내면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내내 외치는 느낌을 준다. 그게 효과적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별로'라고 말하겠다. 슈나벨의 욕심이 좀 과했다. 

  촬영의 난삽함을 메꾸는 것은 윌럼 더포의 뛰어난 연기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에 63세였을 윌럼 더포가 37살의 고흐를 그토록 생동감 있게 재현해낸 것은 정말로 놀랍다. 그는 고흐가 죽기 직전에 정말 저렇게 느끼고 말하고 그림을 그렸겠구나, 라고 관객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솔직히 윌럼 더포의 연기 경력 후반부에 이런 눈부신 재능을 보여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세속의 평범함과 타인과의 교류를 소망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열정과 광기에 사로잡힌 예술가의 내면 풍경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음악도 나름의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카메라를 따라가는 피로를 상당히 누그러뜨리고 영화에 몰두하게 만든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그다지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름대로 고흐의 그림과 죽음과 관련된 흥미로운 가설(자살이 아닌 타살의 가능성, 새롭게 발견된 유작 스케치의 진품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고흐의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기회를 주지는 못한다. 감독이 스스로 말했듯 이 영화는 슈나벨 자신이 느끼는 고흐의 삶에 대한 느낌이며 그것으로 관객이 인간 고흐에 더 가까이 가길 바라는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 슈나벨 표 고흐 영화는 마치 고흐의 어지러운 내면처럼 혼돈, 무질서, 자유로움으로 채워져 있다. 성공적인 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화가가 생의 마지막 날들에 마주친 사람들의 냉담함, 무관심, 조롱과 멸시를 영화적으로 재현한 것은 의미가 있다.

  '고흐, 영원의 문'을 보다가 문득 aljazeera 방송국에서 만든 다큐 'Dreaming of Vincent: China's Copy Artist(2018)'가 떠올랐다. 중국 선전에서 오랫동안 고흐 그림의 모사 화가로 살던 남자는 진짜 고흐 작품을 만나러 유럽 여행길에 오른다. 1시간이 채 안되는 그리 길지 않은 이 다큐는 짝퉁 고흐 그림을 그려서 팔던 이가 고흐의 진짜 그림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담아냈다. 그가 고흐 묘소를 찾아가 불을 붙인 담배를 올려두고 묵념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일개 모사 화가에게 고흐의 삶과 그림은 그 자신의 삶 전체를 뒤흔들 정도의 울림과 감동을 주었다. 비록 비극적인 죽음으로 삶을 마쳤지만, 고흐는 불멸의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 '고흐, 영원의 문'은 그렇게 중단되지 않고 이어지는 고흐 이야기의 작은 쉼표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관객들은 그의 이야기를 흥미로운 다른 영화의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진 출처: facebook.com/AtEternitys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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