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Carla Simón이 포착한 전환기의 스페인 농촌, Alcarràs(2022)

 

  스페인 카탈로니아(Catalonia)의 Alcarràs, 솔레 가족은 2대째 복숭아 농장을 일구어왔다. 복숭아 수확을 앞둔 뜨거운 여름날, 솔레 가족은 땅주인으로부터 갑작스런 통보를 받는다. 복숭아 농장 자리에 곧 태양광 발전을 위한 패널이 설치된다는 것. 로헬리오는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 1936-1939) 당시에 어려움에 처한 땅주인을 보살펴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댓가로 땅을 양도받아 복숭아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제 땅주인의 아들은 공식적인 양도 문서가 없으니 땅은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로헬리오의 아들 키메트은 그 땅에서 복숭아 농사를 계속 짓고 싶다. 하지만 농장의 땅은 너무 비싸서 키메트는 도저히 사들일 수가 없다. 땅주인은 키메트가 태양광 패널 관리를 해주면 그곳에서 계속 지낼 수 있게는 해주겠다고 말한다. 솔레 가족은 이 시련을 어떻게 이겨낼까?

  Carla Simón의 'Alcarràs(2022)'는 관객을 스페인 카탈로니아 농촌의 현실로 안내한다. 솔레 가족이 일구어낸 복숭아 농장의 나무들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대가족의 어린 꼬마 아이들은 농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신나게 논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들 키메트과 딸들, 손주들이 함께 모인 집의 풍경은 정겹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복숭아 나무들은 곧 베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키메트는 농부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에게 농사는 힘겨운 일이고,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써 키운 복숭아는 헐값에 팔린다.

  키메트는 아들 로제르가 공부를 열심히 하길 바라지만 아들은 농사에 흥미를 갖고 있다. 로제르는 불법이지만 돈벌이가 되는 대마초를 아버지 몰래 농장 한 귀퉁이에서 재배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땅은 정직한 노동의 댓가에 보답을 주는 곳이다. 그렇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소작농의 작물은 대규모 농장에서 재배된 과일과 거대 유통 시스템에 의해 제값을 받지 못한다. 로제르는 땅에서 어떻게든 돈을 뽑아내는 작물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키메트는 아들이 키우는 대마초를 모조리 뽑아 없애 버린다.

  문제는 솔레 가족의 농장에서 무슨 작물을 키우느냐가 아니다. 이 대가족의 삶을 가능하게 해준 근원으로서의 땅은 더이상 결실을 맺을 수 없다. 이제 그곳에 설치될 태양광 패널은 전기를 생산함으로써 땅주인에게 돈을 가져다줄 것이다. 솔레 가족에게 이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재앙이지만, 재생 에너지(renewable energy) 산업 그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기후 변화(Climate change)는 사람들에게 에너지 생산과 소비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스페인은 풍부한 일조량과 광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다. 태양광을 비롯해 풍력 발전은 침체에 빠진 스페인 경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카를라 시몬은 그러한 시대적 흐름이 농촌 사람들의 삶과 파괴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을 포착해낸다.

  영화 속에서 태양광 발전 시설은 농부들의 조화로운 삶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문명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인식이 스페인의 침체된 경제와 쇠퇴하고 있는 농촌의 현실에서 얼마만큼의 타당성을 갖고 있을까?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가진 한계는 변화하는 사회를 가족주의의 협소한 틀로 이해하려는 데에서 기인한다. 카를라 시몬은 카탈로니아 대지의 풍요로움과 이상화된 가족주의를 단단하게 결합시킨다.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은 카를라 시몬은 대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는 영화 'Summer 1993(2017)'에서 잘 드러난다. 혈연 관계로 단단하게 결합한 '가족'은 카를라 시몬에게 있어 절대적인 명제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이 지향하는 이러한 가족주의는 전형적인 대가족, 가부장제의 모습을 띈다. 영화 'Alcarràs(2022)'에서 솔레 가족의 중심에는 남성들이 자리한다. 로헬리오가 일구어낸 복숭아 농장, 그 농장을 지켜내려는 아들 키메트, 그리고 복숭아가 아닌 다른 작물로 농장의 미래를 꿈꾸는 손주 로제르. 농장 운영은 남성의 몫이다. 그와는 달리 여성들은 음식을 만들고, 서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 속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유대를 다지는 일이다. 키메트의 아내 돌로스는 가족의 정서적인 버팀목 역할을 한다. 이 조용한 안주인은 남편과 아들의 갈등에 속앓이를 하다가 나중에서야 감정을 터뜨린다. 돌로스는 말을 하는 대신에 남편과 아들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자신의 분노와 답답함을 표현한다.

  영화 'Alcarràs(2022)'는 땅과 거기에 의지해서 사는 농부들이 마주한 시대적 전환점을 묘사한다. 동시대의 사회 문제를 영화로 풀어낸 카를라 시몬의 의도는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다양한 연령대의 일반인 배우들이 영화에 불어넣는 생동감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Alcarràs(2022)'에 내재된 가족주의는 고리타분하다. 영화의 마지막, 중장비 기계들은 농장의 복숭아 나무들을 마구 쓸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관객은 오래된 복숭아 농장과 함께 농부들의 쌓아온 삶의 유산도 스러짐을 본다. 여전히 솔레 가족의 낡은 농가는 위태롭게 서있다. 그리고 마당에는 어린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논다. 이제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어떤 땅의 문화, 삶의 방식을 물려주어야 할까? 아마도 이 영화가 가지는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