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사 수업을 담당한 선생은 일본에서 일본 영화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였다. 그 선생이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과 동기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들 가운데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고 했다.
"왜 영화를 항상 그런 식으로 봐요?"
선생은 일본 영화 속에 내재된 전체주의적 사고 방식, 집단주의와 가족주의, 식민주의에 대한 향수와 같은 맥락을 늘 놓치지 않고 보았다고 했다. 그건 식민 지배의 역사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영화 속에서 읽어내는 것이 일본인들의 눈에는 다소 낯설고 불편하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함께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하나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은 각 사람이 가진 문화적 배경, 그리고 경험의 층위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내가 한국인으로서 일본 영화, 특히 전후의 일본 영화를 보는 것도 서구인들이나 일본인들과 다를 수 밖에 없다.
시미즈 히로시(清水宏, Shimizu Hiroshi) 감독의 1937년작 '바람 속의 아이들(風の中の子供, Children in the Wind)를 보았다. 그 한 편으로 리뷰를 쓰기에는 뭔가 좀 심심하고 모자른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나오는 비슷한 영화를 하나 더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보게 된 영화는 이나가키 히로시(稲垣浩, Inagaki Hiroshi)의 1948년작 '손을 잡은 아이들(手をつなぐ子等, Children Hand in Hand)이었다. 이 영화는 도저히 자막을 구할 수가 없어서 자막 없이 보았다. 둘 다 흑백 영화이고,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화질과 음질의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하다. 별 다른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본 영화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거나 연구자들이나 볼 법한 영화들을 그렇게 두 편 보았다.
'바람 속의 아이들'에는 예기치 못한 송사에 휘말린 아버지의 부재를 겪는 어린 두 형제가 나온다. 아이들의 연기는 그렇게 세련되지도 못하지만, 뭔가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과 활기가 있다. 주인공 형제들과 동네 아이들은 영화 내내 뛰어다니면서 역동적인 에너지를 보여 준다. 그런데 그걸 보는 것이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1937년이면 조선은 식민지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때인데, 일본 본토의 애들 얼굴 속에는 그 어떤 고통과 괴로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 젠타와 삼페이 형제의 집 앞의 큰 나무 맨 꼭대기에는 일장기가 늘 펄럭이는데, 두 형제는 그 나무에 자주 올라서 동네를 바라본다. 나는 '바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도 영 마뜩잖다. 물론 이 영화는 일본의 아동 문학가 츠보타 죠지(坪田譲治)의 소설을 영화한 것으로 '가미카제(神風, Kamikaze)'의 '바람(風)'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손을 잡은 아이들'도 역시 원작이 있다. 원작 소설은 1944년에 발간되었는데, 이 작품은 특이하게 발달 장애를 가진 아동이 주인공이다. 소설을 쓴 이가 특수 교육에 종사한 교육자였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나카무라'는 선생의 무관심과 또래의 이지메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 재봉일을 하는 부모는 고민 끝에 아들을 받아주는 다른 학교로 전학시킨다. 나카무라를 맡게된 담임 선생(류 치수 분)은 학급 아이들을 다독여가며 나카무라가 잘 지내도록 만든다. 그런데 '야마다'라는 못된 아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를 생각하면 된다)가 전학오면서 나카무라의 신세는 동네북으로 전락한다.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 와중에, 착한 아이들이 힘을 합쳐 나카무라를 보호하고 야마다를 응징한다. 그 과정에서 담임 선생은 약간 방관자적인 위치에 서있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아이들이 서로 우정을 회복하고, 나카무라는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194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패전의 굴욕과 고통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카무라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참전하게 되는데, 그가 자신의 아들을 생각하며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는 학교의 벽에 붙여져서 아이들이 모두 읽어야 하는 감동적인 편지로 나온다. 영화는 장애를 가진 아이조차도 사랑과 관용으로 대한다는 그 당시 일본의 교육 제도와 교육자에 대한 약간의 자화자찬 같은 느낌도 준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베푸는 국가와 학교, 선생에 대한 보은을 잊지 말라는 훈계의 뜻이 담겨 있다. 나카무라의 어머니는 아들을 재우기 전에 나카무라에게 아버지와 선생님을 생각하며 두 번 인사하게 한다. 마침내 아들의 졸업식 날, 학교를 나오는 길에 나카무라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학교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한다. 그 장면은 전쟁을 치루는 당시의 일본 사회와 구성원들이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모습 같다.
시미즈 히로시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영화들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들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누군가는 그 어떤 역사적인 배경을 생략하고 그냥 맘편히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어려웠다. '반딧불이의 묘(Grave of the Fireflies, 1988)'가 보여주는 전쟁 피해자로서의 일본 국민들, 그 이기적인 감상주의가 우리 나라의 관객들에게 비판받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이다. 어떤 텍스트들은 그것을 둘러싼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지운 채로, 마치 온전한 진공 상태로 보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이나가키 히로시는 미후네 도시로 주연의 '미야모토 무사시(Musashi Miyamoto 1954)'로 유명한 감독이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후의 유명한 일본 영화 감독들은 1930년대와 40년대에 일본 정부의 검열 하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선전 영화들도 많이 찍었다. 물론 그런 작품들 속에서도 특유의 예술성과 반전 메시지가 보여는 영화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한 배경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한국인으로 그 시절의 일본 영화들을 그냥 맘 편히 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오늘 본 두 편의 영화들도 그랬다. 분명히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아이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들임에도 거기에는 그 당시의 일본 사회와 국가의 모습이 명백하게 투영되어 있다. 그런 맥락을 제거하고 순전하게 영화 그 자체만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피식민지 경험이 없는 서구인들이나 다른 제 3세계의 관객들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나오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사실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 어른들과 세상에 상처받거나, 바깥 세상의 권력 관계를 답습하고 어쩌면 더 잔혹해질 수 있는 그들만의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어른들과 세상은 거울과도 같아서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일제 시대의 일본 영화들 속의 아이들 또한 별 다를 게 없다. '바람 속의 아이들'과 '손을 잡은 아이들'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비평을 하는 이들의 몫으로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영화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층적 의미와 역사와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을 놓치지 않은 것이 좋은 관객으로 영화와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commons.wikimedia.org 영화 '손을 잡은 아이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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