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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포장에 담긴 매혹적인 이야기, The Green Prince(2014)

 

  최근의 다큐멘터리 제작의 세계적 경향을 다룬 뉴스를 읽었다. 예전에 제작되는 다큐들이 대부분 독립 제작사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면 요새는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큐 제작자들과 감독들도 적극적으로 흥행 수익을 생각하면서 아주 감각적이고 흥미있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 거기에는 N사로 대표되는 스트리밍 서비스 회사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었다. 아예 N사가 제작비를 대고 자체 제작하는 다큐들도 많다. 독립 다큐 제작사들도 그 회사와의 계약을 염두에 두고 주제 선정과 관객들의 취향에 맞춘 다큐를 제작하는 것이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잡았다고도 했다. 

  2014년에 Nadav Schirman이 만든 다큐 'The Green Prince'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다큐를 극장에서 상영한다면 과연 관객은 얼마만큼 들 것이며, 흥행 수익은 얼마나 낼 수 있을까? 또는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와 배급 계약을 맺는다면, 시청자 수는 얼마나 될까?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 다큐에 나오는 주요 인물은 두 사람이며, 재연 화면은 대개가 흐리고 뿌연 감시 카메라 화면과 별다른 색감도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에서 매력적인 요소는 바로 '이야기'에 있다. 정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할만큼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두 사람의 인터뷰 화면으로만 엮어 나간다. 이런 다큐를 요새처럼 빠르고 감각적인 영상과 이야기 전개에 익숙한 시청자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 나다브 쉬르만이 이 다큐를 지금 다시 만든다고 한다면 이전의 방식으로는 제작비를 건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다큐 제작에 있어서도 이제 '수익'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 2, 3년간 제작된 해외 다큐들을 보면 확실히 관객의 눈길을 끌만한 소재(때론 커다란 논란까지 불러일으키는)와 직관적인 촬영으로 승부를 본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제는 다큐도 잘 만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다큐 제작자와 감독이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이 시대의 다큐가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 약간은 회의적이 되기도 한다.

  서론이 길었다. 'The Green Prince'는 관객을 극심한 분쟁 지역 한가운데로 안내한다. 팔레스타인의 무장 정치 단체 '하마스(Hamas)', 그 조직의 창립 멤버 Sheikh Hassan Yousef의 아들 Mosab Hassan Yousef 주인공이다. 모사브는 17살 때 총기 소지 혐의로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공포스러웠던 수감 기간 동안 첩보 책임자 고넨은 그를 이스라엘 편에 서서 일하는 스파이가 되도록 회유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모사브는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해 하마스 내부의 기밀을 이스라엘 측에 넘긴다. 그런 모사브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하마스가 저지르는 자살 폭탄 테러를 비롯해 여러 무장 투쟁에 심한 반감을 가졌다. 자신의 행동이 더 큰 인명피해를 막고, 더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의 목숨을 위협받지 않게 하는 안전핀으로 작동할 거라 믿기도 했다.

  모사브가 건넨 첩보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내부 동향을 훤히 꿰뚫게 된다. 그러는 동안 모사브에게 여러 번의 위기가 닥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책임자 고넨은 모사브와의 인간적 유대를 쌓아가며 그를 다독인다. 그러나 그런 고넨이 그때문에 상부의 문책을 받게 되고, 책임자가 바뀌면서 모사브의 위치는 흔들린다. 결국 가족들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서 망명신청을 하게 된 모사브. 과연 미국에서 그는 정착할 수 있을까...

  'The Green Prince'는 매우 흥미있는 첩보 스릴러물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모사브와 고넨의 인터뷰, 별로 성의있게 만든 것 같지도 않는 재연 화면이 전부인 이 다큐를 지탱하는 것은 온전히 '이야기'다. 무장 정치 투쟁 세력을 이끄는 핵심 인물의 아들이 적국의 스파이 노릇을 10년 동안 하다니... 생각만으로도 손에 땀이 나지 않은가? 아주 단촐한 영화적 구성도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는다. 관객들은 저 이야기 다음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보다 보면 그렇다. 이렇게 얼굴 내놓고 다큐까지 만들어도 주인공 모사브의 신상은 괜찮을 걸까? 모사브는 미국이 그의 망명 신청을 거부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송환하려고 하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다. 가족으로부터는 절연당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배신자로 찍혔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입장은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고넨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Green Prince' 모사브를 위해 미국 당국에 호소한다. 바로 이 다큐의 제목은 이스라엘 첩보기관에서 모사브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이 다큐는 모사브가 쓴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무척 흥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감독 나다브 쉬르만이 다큐 제작자로서 윤리적인 책임감을 더 무겁게 느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이 다큐로 인해 모사브의 목숨이 더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 모사브 본인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촬영에 협조한 것이라도 해도 그렇다. 그는 아직도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닌다는 뉴스를 읽었다.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현실로 이어지지는 못한 모양이다. 저런 극적인 삶을 사는 인물의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다큐는 뭔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첨예한 정치적 문제와 함께 인물의 신상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단지 책의 내용을 다큐로 만들었을 뿐, 무언가 새로운 다큐적 성취라던가 대단한 성찰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내가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한 것은 '이야기'가 가진 매혹적인 힘이었다. 정말로 괜찮은 이야기는 포장이 허술하기 짝이 없어도 관객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뿐이다. 다큐 그 자체로는 실망스럽고, 그다지 주목할만한 무언가가 없다. 하나 꼽으라면, 현대 음악 작곡가 막스 리히터가 담당한 음악이다. 관객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시종일관 낮게 깔리면서 불안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놀랍다.    


*사진 출처: hollywoodrepor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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