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이탈리아 작가 Carlo Collodi의 '피노키오의 모험(The Adventures of Pinocchio)'이 출판되었다. 카를로 콜로디가 살았던 시대는 이탈리아 독립 전쟁(Italian Wars of Independence, 1848-1860)으로
이탈리아 사회가 매우 불안정하고 어려운 때였다. 혁명과 전쟁의 시절에 작가 콜로디 또한 정치 운동에 잠시 몸을 담기도 했다.
하지만 곧 환멸을 느낀 그는 글을 쓰는 일에 전념했다. 그런 그가 쓴 동화 '피노키오'에는 격변기의 이탈리아 사회와 민중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다.
나무 인형 피노키오는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사기꾼들에게 돈을 빼앗기고 온갖 고생을 겪는다. 이
나무 인형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은 지극히 계몽주의적이다. 착한 요정의 지속적인 도움과 학교 교육 시스템을 통해 피노키오는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 들어온다. 카를로 콜로디는 하층 민중의 진정한 교화를 '피노키오'를 통해 보여준다.
Guillermo del Toro의 'Pinocchio(2022)'는 원작의 서사를 따오기는 했으나,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작품처럼 보인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원작의 선량한 목수 제페토를 알콜 중독자로 추락시킨다. 제페토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피노키오를 만든다. 절망에
빠진 늙은 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나무 인형을 통해 아들이 환생하길 바란다. 제페토에게 있어 피노키오는 죽은 아들은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페토와 피노키오가 맺게 되는 부자(父子) 관계는 결코 건강한 관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제페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은 필연적으로 피노키오를 향한 실망으로 이어진다. 피노키오가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제페토의 어그러진 부성(父性)에 있다. "넌 나에게 짐(burden)만 될 뿐이야!"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향해 그렇게 외친다.
그런데 '피노키오'에서 아들을 향해 자신의 소망과 이상을 투사(projection)하는 아버지는 제페토 말고 또 있다. 나치
추종자 포데스타는 아들 캔들윅을 전쟁터에 내보내려고 한다. 포데스타는 전쟁에 대한 아들의 두려움을
무시하며, 캔들윅에게 혹독한 훈련을 통해 살상 기계로 거듭나기를 요구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제페토와 포데스타가 보여주는 뒤틀린
아버지의 모습을 시대와 연결시킨다.
'피노키오'의 시대적 배경은 2차 세계 대전 시기로 바뀐다. 제페토의 아들
카를로는 성당에 있다가 폭격기의 공습으로 인해 죽었다. 카를로가 죽는 장소가 '교회'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피노키오'에서 종교는 극단의 시대에
진정한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 마을 신부는 포데스타와 협력하며, 주정뱅이가 된 제페토를 비난할 뿐이다. 전쟁은 제페토를 알콜
중독자, 그리고 피노키오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나쁜 아버지로 만들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포데스타는 파시즘에 경도되어 아들을 전쟁터로 내몬다.
아버지 제페토에게 상처받은 피노키오는 볼프 백작의 꾀임에
넘어가 유랑 극단의 단원이 된다. 표면상 볼프 백작은 흥행사(impresario)로 공연자 피노키오와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볼프 백작의 실체는 피노키오를 착취하는 악덕 사업주이다. 이 악당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존재가 있다. 원숭이
Spazzatura는 볼프 백작에 의해 구조되어서 백작과 지내게 되었다. 스패짜투라는 백작의 관심이 돈을 벌어다주는 피노키오에게
기울자 상심한다. 이 가여운 원숭이는 백작이 자신을 때리고 학대함에도 불구하고 백작의 온전한 애정을 갈구한다. 볼프 백작이 스패짜투라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제페토와 포데스타에 이어 이 영화 속 가장 일그러진 부성의 모습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렇듯 실패한 아버지의 서사를 등장 인물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현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당시 이탈리아의 통치자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있다. 볼프 백작은 무솔리니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피노키오에게 무솔리니를 위한 프로파간다(propaganda) 공연을 하도록 강요한다. 그는 '피노키오'를 통해 폭압적인 지도자와 그가 이끄는 국가에 대해 우화적으로 비판한다.
영화 속 무솔리니는 'Il Duce'로 불린다. 그 의미는 단순히 '지도자(the leader)'일 뿐이지만, 무솔리니가 남긴 어두운 그림자는 오늘날에게 이어지고 있다. 2022년, 극우 정당인 이탈리아 형제당(Fratelli
d'Italia)은 우파 연합을 이끌며 총선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탈리아 형제당의 이념과 뿌리는 무솔리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극우파들에게 무솔리니는 위대한 지도자이며 국부(國父)로 추앙받는다.
원작자 카를로 콜로디는 피노키오에게 인간 아이의 행복한 삶을 선물하며 동화를 끝낸다. 그것은 거짓말을 일삼던 피노키오가 도덕
규범을 익히고, 공교육을 통해 사회 질서에 순응하게 됨으로써 주어진 보상이었다. 그와는 달리 기예르모 델 토로는 자신이 만든
피노키오가 인간이 아닌 영생(永生)을 지닌 나무 인형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피노키오는 결코 아버지 제페토가 바라는 착한 아들
카를로가 될 수 없다. 거칠게 다듬어진 나뭇결의 머리, 불에 탄 발목에 덧대어진 새로운 나무 다리의 모습 그대로도 피노키오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원작의 세계를 과감하게 해체해 버리고 그 자리에 실패한 아버지들의 서사를 이어붙였다. 이 새로운 '피노키오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어른들로 하여금 현재 자신이 맺고 있는 부모-자식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것을 요청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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