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전후 일본 소시민의 일상을 엿보다, 금일휴진(本日休診, Honjitsu kyushin, 1952)

  

  자막이 없이 영화를 볼 때가 가끔 있다. 영어로 된 영화를 자막 없이 볼 때도 있고, 오래된 일본 영화도 종종 그럴 때가 있다. 대충 아는 언어로 영화를 보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래도 좋은 영화들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어서 관객이 자막이라는 보조 도구가 없어도 따라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시부야 미노루(渋谷実, Minoru Shibuya)감독의 1952년 영화 '금일휴진(本日休診)'의 경우도 그랬다. 영어 자막을 도저히 구할 수 없어서, 일본어 자막을 띄워놓고 드문드문 알아듣는 일본어를 꿰맞추어가며 봤다. 코미디 장르라 그런가, 회화가 그리 길거나 어렵게 들리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 영화는 나름의 괜찮은 흐름을 가지고 관객을 안내한다.

  소도시에서 작은 병원을 하는 야츠하루 선생은 조카에게 원장 자리를 물려준 지 1년이 되었다. 그것을 기념하며 하루 휴진을 하는데, 아침부터 병원은 부산스럽다. 제대 후 정신이 이상해져서 수시로 소리지르며 발작하는 퇴역 군인 유사쿠를 진정시켜야 했던 것. 그렇게 한숨 돌리고 났더니 다음에는 경찰이 강도를 당한 유코라는 아가씨를 데려온다. 병원에는 야츠하루 선생을 찾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진다. 출산이 임박한 가난한 임산부도 살펴봐야 하고, 도박을 못하게 해달라며 손가락을 마비시켜주는 주사 놔달라는 야쿠자도 온다. 평온한 은퇴의 일상을 꿈꾸는 야츠하루 선생에게 휴진이 가능한 날이 오기는 올까...

  시부야 미노루의 '금일휴진'은 1949년에 나온 이부세 마스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장르는 코미디이지만, 이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웃음 뒤에는 당시 소시민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아마도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는 것으로 추정되는 퇴역군인 '유사쿠'가 그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툭하면 큰소리로 군가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는 유사쿠를 야츠하루 선생을 비롯해 동네 사람들은 따뜻하게 보듬는다. 이 영화에서 유사쿠의 존재는 전후의 상흔이 제대로 치유되지 않고 공동체 안에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정신적인 고통에 더해 소시민들의 삶은 가난하고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버려진 기차에서 아이 넷을 데리고 사는 부부에게 다섯째 아이가 태어난다. 작은 배를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영화 내내 야츠하루를 찾는 환자들은 '병원비' 걱정을 한다.

  야나기 에이지로가 분한 의사 야츠하루는 무척이나 인간적이고 소탈하다. 돈 걱정을 하는 환자들에게 따뜻한 말로 괜찮다며 안심시키고, 계란 몇 개를 진료비 대신 받아도 웃는다. 어떤 경우에도 환자들의 왕진 요청을 외면하는 법도 없다. 뺀질거리는 동네 도박꾼에게 맹장수술을 해줬더니, 패거리는 병원비를 내지 않고 도망가면서 병원 리어카까지 훔쳐간다. 그런 일을 겪어도 야츠하루는 낙담하지 않고 환자를 성심성의껏 돌본다. 말하자면 인품이 좋은 큰어른 같은 인상을 준다. 정신이 이상해져서 때론 날뛰는 유사쿠를 진정시키고 그의 기행(行)을 가장 잘 받아주는 것도 야츠하루 선생이다. 어쩌면 그 마을 사람들에게 야츠하루는 정신적 버팀목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금일휴진'은 그렇게 의사 야츠하루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전후 일본 소시민의 삶을 보여준다. 전쟁의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보통의 평범한 일본인들은 그것에서 조금씩 벗어나 새로운 희망과 행복을 꿈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의 시선은 하층민들이 겪는 가난과 고통에 촛점을 맞춘다. 그는 원폭 피해자의 일기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검은비(黒い雨)'를 쓴 참여적 작가이다. Imamura Sohei의 영화 '검은비(Black Rain, 1989)'는 바로 마스지의 소설이 원작이다. 그런 원작자가 쓴 '금일휴진'에서 유사쿠 캐릭터가 갖는 상징성이 전쟁의 고통 그 자체라는 것을 관객들은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유사쿠는 해질녁에 다시 발작을 일으켜서 야츠하루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을 공터에 불러모아 놓고 연설을 한다. 그때 하늘에는 먼곳으로 향하는 기러기 떼가 지나간다. 그리고 새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특히 유사쿠는 감동을 받아 평온해진 표정을 짓는다. 함께, 그리고 자유롭게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어떻게든 그 고난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소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전후 소시민들의 삶의 애환, 거기에 함께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가려는 희망의 의지를 발견한다.


*사진 출처: commons.wikimedia.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