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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1편: 은빛산의 끝(銀嶺の果て, Snow Trail, 1947)

 

은빛산의 끝(銀嶺の果て, Snow Trail, 1947), 다니구치 센키치(谷口千吉, Senkichi Taniguchi)


1. 산악 영화에 투영된 미군정의 문화 전략, 은령의 끝(銀嶺の果て, Snow Trail, 1947)


  1945년 8월, 일본의 침략 전쟁은 처절한 패배로 끝을 맺었다. 곧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가 패전국 일본을 점령, 통치했다. GHQ는 군국주의 국가 일본을 새롭게 개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청사진은 민주주의 정치 체제로의 전환,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악습의 타파,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인본주의적 사상의 전파를 담고 있었다. 정치와 사회 체제의 개혁과 함께 일본 국민의 의식구조 전환도 시급한 과제였다. GHQ는 일본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로서 전쟁의 책임을 자각하고 반성하길 원했다. 그런 면에서 미디어의 통제와 검열은 필수적이었다. 언론을 비롯해 다양한 매체의 미디어는 GHQ의 엄격하고 세심한 관리를 받았다.

  일본의 영화 산업은 그런 기류에 발빠르게 적응했다. 패전 직후 영화사들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들은 제작 스튜디오를 재건하고 영화 인력을 재편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영화사들이 중점을 둔 것은 GHQ의 검열 기준에 적합한 영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전에는 군국주의 국가 일본의 정치 선전(propaganda)에 충실했던 영화는 이제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상정된 미국의 가치 기준을 설파하기 위해 앞장섰다. 미군정(美軍政)은 이러한 영화사들의 변화를 열렬히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영화 '은빛산의 끝(銀嶺の果て, Snow Trail, 1947)'은 미군정 치하에서 만들어진 영화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다니구치 센키치(谷口千吉, Senkichi Taniguchi) 감독의 이 영화는 각색 작업을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Akira Kurosawa)가 맡았다. 전후 일본을 이끌 중요한 감독으로 부상하게될 구로사와 아키라는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물론 각본가로서 자신의 역량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빛나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이다. 영화 제작 인력으로 영화사에 들어갔던 미후네 토시로는 뜻하지 않게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은령의 끝'은 그가 만들어낼 장대한 필모그래피의 첫 시작이었다. 미후네 토시로는 스크린을 채우는 존재감만으로도 자신이 배우임을 입증한다.

  영화는 강렬한 도입부로 시작한다. 은행 강도 3인조의 탈주를 알리는 신문 기사에 이어 그들이 달아난 나가노 산간 마을에 경찰 수색 본부가 세워진다. 강도들이 숨어든 여관 일대는 폭설로 고립되어 탈주로가 차단되어 있다. 경찰은 강도들의 검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자신한다. 하지만 수색대가 여관에 도착해보니 강도들은 눈사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산 위쪽으로 도주한 상태였다. 3명의 강도들 가운데 한 명이 눈속에서 죽고, 남은 2명은 산 정상에 자리한 작은 산장을 발견한다. 산장에는 늙은 노인과 손녀딸 하루코, 등산객 혼다가 머물고 있다. 에지마(미후네 토시로, 三船敏郎 분)와 노지리(시무라 타카시, 志村喬 분)는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산장에 머문다. 두 강도는 산의 지리를 잘 아는 혼다를 협박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데...

  '은빛산의 끝'은 스릴러의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산악 영화(mountain movie)이기도 하다. 설산을 배경으로 강도들과 수색대의 대치, 강도들의 목숨을 건 도주 행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물론 스튜디오 촬영 장면과 실사 배경을 합성한 주요한 장면들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사람 키만큼 쌓인 엄청난 눈 속을 헤치며 촬영팀이 찍은 산의 풍경은 압도적이다. 이 영화에서 '산'은 타락한 사회와 대비되는 순수한 자연이다. 돈에 눈이 멀어 범죄를 저지른 강도들은 고결한 은색의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의 초반부에 한 명의 강도가 눈사태로 죽고,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에지마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잘못을 뉘우친 노지리만이 살아남는다.

  노지리는 산장의 노인과 손녀가 보여준 환대에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 본다. 노인의 착한 손녀딸 하루코는 노지리에게 그의 죽은 딸을 떠올리게 만든다. 산장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자리, 하루코와 등산객 혼다는 레코드판에서 나오는 노랫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미국의 작곡가 스티븐 포스터(Stephen Foster)의 '오 수재너(Oh! Susanna)'와 '켄터키 옛집(My Old Kentucky Home)'. 참으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담당한 구로사와 아키라는 음악 채택에 자신의 의견을 보탰다(출처, ja.wikipedia.org). 구로사와 아키라는 미국 민요가 은행 강도 범죄자의
개심(改心)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만약 그 부분에서 일본의 전통 민요가 쓰였다면 당시 일본 관객은 과거의 시대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진은 어떤 식으로든 구시대적 일본의 가치관, 그러니까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이전의 일본 사회를 떠올리게 만드는 요소들을 피하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것은 미군정 치하에서 영화사들이 유념해야할 제작 방침이기도 했다.

  영화의 마지막, 체포된 노지리는 경찰과 함께 기차에 오른다. 손에 수갑을 찬 노지리는 경찰에게 기차 창문의 커튼을 걷어달라고 부탁한다. 노지리는 눈 쌓인 산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은백의 순수한 산은 죽음의 위기에 처한 범죄자 노지리에게 갱생의 기회를 부여했다. 노지리는 과오를 뉘우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지리의 변화는 전후 일본이 당면한 사회적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 GHQ는 일본 국민이 침략 전쟁을 일으킨 과거를 참회하며 전후 재건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주길 원했다. 그렇게 미군정 치하에서 제작된 영화 '은빛산의 끝'은 영화가 정치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포장할 수 있는 문화 전략임을 입증한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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