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비밀과 거짓말, The Quiet Girl(2022)

*이 글에는 영화 'The Quiet Girl(2022)'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카이트(Cáit). 이것이 소녀의 이름이다. 1981년 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마을, 카이트는 가난한 집 5남매의 한 아이이다. 가장인 아빠는 게으르고 무능력하다. 카이트의 엄마는 집안일과 농사일을 꾸려나가느라 항상 지쳐있다. 카이트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렇지 않아도 삶이 고단한 카이트의 엄마는 또 아이를 가졌다. 카이트의 부모는 궁리 끝에 잠깐 동안 카이트를 친척 집에 맡기려고 한다. 카이트는 그렇게 에블린과 숀 부부의 집에 가게 된다. 엄마와 먼 사촌이 되는 에블린은 자신의 집에 온 카이트를 따뜻하게 맞이한다. 하지만 숀은 카이트에게 처음부터 거리를 두려는듯,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지극히 내성적인 9살 소녀는 부모는 물론 형제들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한다. 카이트의 자매들은 학교에서 카이트가 따돌림을 당할 때에도 모른 척 한다. 오히려 그런 아이들과 함께 카이트를 비웃기까지 한다. 양육과 노동의 이중고에 시달린 카이트의 엄마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인다. 카이트의 아빠가 가진 자기 중심성은 에블린의 집에 카이트를 데려다줄 때 확연히 드러난다. 이 아빠는 차 뒷좌석에 있는 카이트의 여행 가방을 내려놓을 생각도 못하고 그냥 떠나버린다. 카이트는 입고 온 원피스 한 벌로 지내야하는 상황이다.

  Colm Bairéad 감독의 'The Quiet Girl(2022)'은 매우 소박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외로운 소녀는 따뜻한 친척 부부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감정의 소통을 배운다. 이 단순한 플롯이 가진 한계를 Colm Bairéad는 영리한 촬영 기법으로 극복한다. 소녀의 시점 쇼트(POV, point of view)로 제시되는 많은 장면들은 관객을 카이트의 내면으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카메라는 이 소녀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고 느끼는 감정 그 자체를 충실히 반영한다. 무릎 높이의 Low angle 쇼트를 비롯해 카이트가 응시하는 주변 사물은 주의깊은 몽타주 쇼트로 편집된다. 예를 들어서 카이트가 머물게 된 에블린의 집 작은 방의 벽지를 비춰주는 장면이 있다. 그 벽지를 채운 무늬는 작은 기차와 자동차, 비행기였다. 아마도 소녀는 어른들만 사는 이 집에 아이의 방에나 어울릴 법한 벽지가 도배되어 있는지 궁금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카이트는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이 집에는 비밀이 없어. 그러니 너도 무엇이든 솔직히 말해야 한단다."

  에블린은 카이트에게 마음을 열고 솔직히 자신을 대하라며 그렇게 일러준다. 하지만 그 집에는 카이트가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카이트는 마을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에게 카이트를 소개하고 싶어한 숀의 뜻이었다. 에블린과 숀은 경야(經夜, Wake, 아일랜드 장례식의 고유한 풍습)를 지내야만 한다. 에블린을 대신해 카이트를 집에 데려다 준 동네 여자는 심술궃은 사람이다. 카이트는 그 여자로부터 에블린과 숀 부부의 죽은 아이 이야기를 듣는다. 비로소 소녀는 왜 자신이 한달 동안 남자 아이 옷을 입고 있었는지, 자신의 방 벽지에 비행기와 자동차가 그려져 있었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다.  

  에블린과 숀 부부의 잊혀진 상처와 비밀이 드러나고, 카이트는 혼란에 빠진다. 카이트를 향한 에블린의 환대와 배려는 과연 순수하기만 했을까? 어떤 면에서 카이트는 에블린에게 죽은 아이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카이트와 지내는 시간은 에블린과 숀 부부에게 잃어버린 행복을 가져다 주었음이 분명하다. 서로에게 다소 냉담했던 부부는 웃음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로부터 카이트는 사랑과 기쁨, 생의 활력이 무엇인지 배운다.

  이제, 이별의 시간이 갑자기 다가온다. 카이트는 부모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돌아온 집에는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카이트는 집안을 채운 가난과 우울, 무관심에 다시 익숙해져만 한다. 에블린과 숀 부부가 카이트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카이트는 계속 기침을 한다. 에블린의 집 근처 우물에 빠졌다가 카이트는 겨우 살아났다. 그 일은 에블린과 숀에게 걱정거리가 된다. 카이트의 부모는 딸이 병에 걸려서 온 것이 아닌가 싶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러자 카이트는 감기에 걸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세차게 내젓는다.

  카이트는 소중한 사람들의 비밀을 지켰고,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했다. 카이트가 떠나는 숀을 향해 달려가 안기며 '아빠(Daddy)'라고 속삭인다. 이 조용한 소녀는 비로소 가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비밀과 거짓말의 세계를 통과하면서 소녀에서 어른의 시간으로 들어선다. 영화 'The Quiet Girl(2022)'은 관객들에게 영화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선물한다. 그것은 근원적 정서의 교감(交感)이다. 9살 소녀 카이트가 느끼는 외로움과 슬픔, 기쁨, 그리고 아스라하게 감지되는 생의 의미까지 관객은 그 모든 것을 함께 한다. Colm Bairéad 감독은 아일랜드의 평화로운 풍광 속에 한 소녀의 내적 여정을 아로새겨 넣는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아, 홍상수: 물안에서(In Water, 2023)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는 승모가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