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가려진 여성 뮤지션의 발견, Stop Making Sense(1984)

 

  '영화의 이해'는 영화 공부를 시작하던 첫해에 들었던 과목이었다.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아주 기초적인 내용들, 예를 들면 쇼트와 시퀀스, 영화에서의 방향성, 뭐 그런 것들. 방향성을 배울 때 예시로 나왔던 영화는 신상옥 감독의 '벙어리 삼룡이(1964)'였다. 삼룡이 역을 맡은 김진규가 집 마당에서 바깥으로 내달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쇼트가 바뀌어도 그 달리는 방향이 일관성이 있어야 관객은 안정감을 느낀다는 내용. 그 밖에 많은 유명 영화들이 수업의 교재가 되었다. 때론 뮤직 비디오도 나왔다. 그 가운데 어떤 가수가 나온 장면이 있었다. 키가 꽤 큰 남자 가수가 자신의 체구보다 훨씬 큰 흰색 양복을 입고, 고개를 비둘기처럼 까딱까딱 앞뒤로 흔들면서 노래를 불렀다. 나를 비롯해 다른 학생들에게도 그 가수의 노래며 퍼포먼스는 기이하고, 좀 웃기기도 하고 그렇게 보였었다. 그 지직거리는 화면 속에 나온 밴드의 이름이 'Talking Heads'라고 나중에 교수가 알려줬다.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다.

  Jonathan Demme의 다큐 'Stop Making Sense(1984)'를 보고 나서야, 그 수업 시간에 봤던 장면이 이 다큐의 도입부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영화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서 우연히 다시 만나기도 한다. 이 다큐는 토킹 헤즈가 1983년 12월에 Hollywood Phantages Theater에서 3일간 공연한 장면을 편집한 것이다. 다큐의 제목 'Stop Making Sense'는 그들의 앨범 'Speaking In Tongues' 수록곡인 'Girlfriend Is Better'에 나오는가사다. 공연은 리드 보컬 데이비드 번(David Byrne)의 열창과 놀라운 퍼포먼스, 그리고 밴드 구성원들에게 뿜어져 나오는 흥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나처럼 토킹 헤즈에 대해 말그대로 '1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흥겹다. 대중성과 전위적 혁명성, 그 두 세계 사이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 그들의 음악은 기괴하면서도 놀랍다.

  1시간 반 가량에 이르는 이 다큐를 보고 나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와 사람들에 대해서 뭐라고 써야 하나? 그럴 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냥 파보는 수 밖에. 토킹 헤즈 밴드의 역사, 멤버 구성원들, 특히 데이비드 번은 어떤 인물인지도 자료를 찾아 본다. 다큐에서 첫곡 'Psycho Killer'를 부를 때 딱 알아봤지만, 역시 이 양반도 그냥 보통 사람은 아니다. 노래만 부른 게 아니라 희곡도 쓰고, 영화음악도 만들고, 뭐 무슨 공연에서 연기도 하고 아무튼 예술적 감성 충만한 삶을 살아낸 이였다. 독특한 자기 초상 사진을 찍은 사진 작가 신디 셔먼하고 한때 연인 사이로 지내기도 했고.

  그런데 사실 'Stop Making Sense'를 보면서 내 눈길을 끌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기타를 들고 춤도 추고, 노래(두번째 곡 'Heaven')도 부르며 건반도 연주하는 여성 베이시스트 티나 웨이마우스(Tina Weymouth)였다. 예쁘장한 외모의 여성 뮤지션이 넘치지 않는 절제된 감성으로 밴드 멤버들과 어울려 멋진 공연을 펼치는 것을 보며 궁금증이 일었다. 데이비드 번과 연인 사이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더랬다. 그런데 티나의 연인이 밴드에 있기는 했다. 드럼을 맡은 크리스 프란츠. 그 두 사람은 이미 1977년에 결혼한 사이였다.

  그 당시에도 인기있는 여성 가수들이 있었지만, 남자들의 전유물처럼 보였던 록 밴드에서 여성 멤버는 좀 더 눈에 띄고 독특하게 보였다. 다큐는 어떤 면에서 데이비드 번의 원맨쇼인 것도 사실이다. 실질적으로는 토킹 헤즈가 그 자신이고, 데이비드 번이 토킹 헤즈이기도 하니까. 그는 밴드의 중심이었고 그가 다른 분야의 창작 활동으로 외도하는 동안 밴드는 정체기에 들어갔다. 결국 그렇게 쌓인 멤버들의 불만으로 밴드는 1991년, 해체의 수순을 밟는다. 토킹 헤즈가 해체된 이후에도 티나는 남편과 함께 자신의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뭐랄까, 지금의 여성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선배의 삶을 살았다고나 할까, 그런 인상을 받았다.

  티나 웨이마우스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2017년 9월에 'Paper(papermag.com)'매체와 인터뷰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여성 뮤지션으로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나름의 회고가 실려있었다. 자신의 경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토킹 헤즈의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밴드 초창기에 데이비드 번이 베이시스트를 2년 동안 구하지 못해서 고생했는데, 보다못한 티나가 직접 기타를 사서 독학을 했었다고 했다. 그런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펑크의 정신을 실현했다고 자평했다. 밴드가 유명해지기 이전, 이런저런 고생을 할 때 티나에게는 일종의 살림꾼 역할까지 맡겨졌다. 로드 매니저처럼 밴드 일정 관리하고 멤버들 다독이며 그렇게 지냈던 것이다.

  그렇게 밴드에 투신했음에도 리더였던 데이비드 번은 티나를 박하게 대했다. 티나는 밴드의 일원이 되기 위해 번에게 3번이나 오디션을 봐야했는데, 그것은 다른 멤버들은 하지 않는 일이었다. '이 바닥은 여자에게 험한 세계이므로, 여성의 역할이 대단할 필요는 없다'고 그는 티나에게 말했다. 그런 데이비드는 뭔가 일이 안풀릴 때마다 티나에게 성질도 꽤나 부렸던 모양이다. 자신의 부인이 그런 대접을 받아도 남편 크리스에게 별 뾰족한 수가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데이비드 번이 밴드 얼굴이나 마찬가지인데 뭐 어쩌겠는가. 티나는 그 모든 것을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버텼다. 그러나 세상은 티나를 뛰어난 뮤지션이 아니라 토킹 헤즈의 부속품처럼 바라봤다. 티나가 했던 언론 인터뷰의 대부분은 데이비드 번에 대한 질문이었고, 자신은 그때마다 아주 잘 대답해주었다고 했다. 어쨌든 자신은 '여성' 기타리스트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음악과 '뮤지션'으로 인정받길 원했다고 인터뷰 말미에 덧붙였다. 티나는 토킹 헤즈의 멤버로 2002년에 락 음악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티나의 인터뷰를 읽고 나서 내가 봤던 'Stop Making Sense'를 떠올려 보니, 뭔가 다르게 보였다. 그 공연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어떤 무언가가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이 다큐의 관객들은 리더 데이비드 번이 보여주는 독창적인 음악 세계와 무대 매너에 매혹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공연은 전적으로 그만의 것은 아니다. 밴드 구성원들과 서브보컬을 맡은 두 명의 여성 흑인 멤버들 모두 하나가 되어 열정적인 공연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관객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굉장히 에너지가 넘치는 공연이었음에도 관객들이 무척 점잖다고 해야할지 매너가 무척 좋았다. 흥겨워서 객석에서 추는 춤도 너무 얌전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심한 괴성을 지르거나 뭘 내던지고 그러지도 않았다(마지막 부분에 손수건인지 뭔가가 날아다니기는 했다). 인상적이었던 것이 꼬마 관객도 있었던 점인데, 꼬마가 흰색 유니콘 인형 들고 신나서 흔드는 모습이 참 좋았다. 이 공연은 모든 것 마치 중용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누군가 이 공연을 보고 쓴 짧은 댓글이 기억난다.

  "데이비드 번은 방금 정신 병동에서 탈출한 것 같은 모습인데, 매우 침착하게 행동한다."

  진짜 그랬다. 마치 영혼 가출한듯이 노래 부르고 춤도 추는데, 데이비드 번은 아주 절제된 무대 매너를 보여준다. 조나단 드미는 그 공연 현장의 모든 것을 빠뜨리지 않고 꽉꽉 눌러 담았다. 특히 이 다큐는 편집이 무척이나 빼어나서, 도무지 뭘 이어붙였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신기에 가깝다. 

  토킹 헤즈 팬이야 이 다큐는 두고두고 돌려보는 것이겠지만, 이런 음악에 문외한인 관객들에게도 'Stop Making Sense'는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내게는 이 다큐에 나온 여성 뮤지션 티나 웨이마우스의 존재를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어떤 다큐멘터리를 만나는 것은 그렇게 가려진, 잘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burningthecelluloid.com(뒷 부분에 보이는 인물이 티나 웨이마우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