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평론의 의미를 생각하다, 토니 에드만(Toni Erdmann, 2016)

 

  소설이나 시나리오 작법 책들에 나오는 글쓰기 원칙이란 것이 있기는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이런 규칙이다. '정해진 극중의 시간 속에서 주인공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변화, 성장, 깨달음,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어떤 것이든 주인공은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와는 달리 나중에 무언가 조금이라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독자와 관객들이 그런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마렌 아데(Maren Ade) 감독의 '토니 에드만(Toni Erdmann, 2016)'의 이네스(Sandra Hüller 분)는 바로 인물의 그 '변화'를 보여주는 괜찮은 예이다. 

  러닝타임 2시간 42분, 꽤나 긴 시간 동안 크게 빵빵 터지는 무언가는 없지만, 잔잔하면서도 소소한 재미들이 있다. 뭔가 낯설고도 독특한 유머 감각을 보여주는 이 코미디 영화의 여정은 정말 기이하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은 고무공을 따라가는 느낌이 든다. 그 여정의 끝에 만나는 감정은 약간의 평온함과 안도감, 그리고 미소이다.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인 딸 이네스와 소원한 사이인 아빠 빈프리트. 그는 휴가를 내서 딸이  있는 루마니아로 찾아간다. 딸은 그런 아빠와의 만남이 어색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아빠는 잠깐 딸 얼굴 보고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딸 주변을 계속 맴돈다. 우스꽝스런 틀니에 가발까지 쓰면서 자신을 인생 코치 '토니 에드만'으로 소개한다. 이네스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런 아빠를 때론 못 본 척하면서 이 부녀(女)는 나름의 역할극을 해나간다. 아빠는 힘들고 빡빡한 회사 생활에 치이는 딸이 안쓰럽기만 하다. 뭔가 함께 하면서 도움을 주고 싶은데 딸은 그런 아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과연 '토니'는 딸에게 인생 코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관객들이 영화의 끝에 도달했을 때, 이네스의 변화를 감지한다. 일에 쫓기던 조급하고 팍팍한 모습의 이네스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후, 이네스는 아빠의 분장용 틀니를 끼고 할머니의 모자를 써본다. 그 틀니를 낀 '토니'의 모습을 참기 힘들어 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인생 코치 토니의 조언을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그 조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고 잡아둘 것,

  그리고 유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영화는 결국 2시간 42분을 흘려 보낸다. 기이하고도 낯선 코미디의 여정은 그렇게 끝이 난다. 나름 훈훈한 결말이다. 보고 나서 느낀 것은 그렇다. 괜찮은 영화기는 한데, 이 영화를 둘러싼 평들은 너무 과대포장된 것들이 많다. 세대간의 단절(아버지와 딸의 소통 문제), 직장내의 성차별 문제(이네스를 갈구는 남자 상사),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단면(낙후된 루마니아 회사를 구조조정하는 이네스의 업무), 뭐 이런저런 것들을 분석하고 쪼개고 참 고단하게 영화를 보는구나 싶다. 이 영화에 별점을 준다면 다섯 개 만점에 딱 세 개가 적당하다. 반 개를 더 줄 수도 있겠다. 이네스 역의 잔드라 휠러의 열연, 그야말로 온몸을 내던지는 연기가 눈부시다. 자신만의 감성으로 휘트니 휴스턴의 'Greatest Love of All'을 부를 땐 눈물이 찔끔 났다. 극한 직업 '배우'를 저렇게 보여주는구나, 탄성이 절로 나온다.

  '토니 에드만'은 평범함을 벗어난 괴상한 수작(作)은 될 수 있다. 괴상하다고 표현한 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유머 감각, 서사의 전개가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힘있게 끝까지 밀고간 마렌 아데의 연출이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걸 명작이라고 치켜세울 수는 없다. 도대체 그런 뻥튀기 평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영화를 지루하게 보았다는 어떤 관객이 쓴 글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

  '상을 무지하게 많이 받은, 평론가들이나 좋아할 법한 영화.'

  60점짜리 영화를 90점, 100점으로 만드는 평론의 마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런 마법을 마구 휘두르다가 정말로 영화의 본질을 놓치고, 영화 평론이 관객과도 유리되는 것은 아닌지 '토니 에드만'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다.

 

*사진 출처: sbs.com.au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