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는 해변을 홀로 걷는다. 해변에는 그 어떤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냥꾼의 옷차림을 한 이
남자는 대체 그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남매인 Maxim Arbugaev와 Evgenia Arbugaeva는
다큐멘터리터리 제작자이다. 그들은 러시아 연방의 최북단 자치구 Chukotka에서 그곳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을 촬영하던 중이었다.
그곳에서 남매는 해양 생물학자 Maxim Chakilev를 알게 되었다. 25분의 이 단편 다큐 'Haulout(Выход, 2022)'는 바로 그 해양 생물학자의 Chukotka 체류기를 담아내었다.
차킬레프가 관찰하는 동물은 바다코끼리(Walrus)이다. 그는 바다코끼리가 Chukotka 지역 해안가로 몰려드는 가을 동안
연구 활동을 수행한다. 말이 연구이지 실상은 고행에 가깝다. 바닷가의 허물어질듯한 오두막이 그의 거처이다. 차킬레프는 쌍안경으로
바다코끼리를 늘 관찰하며 그 내용을 녹음기로 녹음한다. 밤에는 낮 동안 수행한 연구 활동을 기록으로 정리한다. 식사는 통조림과
마른 빵 한 조각으로 해결한다. 아마도 담배가 그의 유일한 위안일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담배도 다 떨어졌다. 그는 깡통에
모아둔 꽁초를 분해해서 겨우 피울 담배를 하나 만들어 낸다.
북극과 가까운 혹한의 Chukotka를 찾는 이들은 학자들과 동물들이다. 해변가는 바다코끼리로 꽉꽉 들어찬다. 그의 오두막은 말
그대로 바다코끼리에 의해 포위당했다. 그는 오두막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무려 1미터 길이에 달하는 엄니를 지닌
바다코끼리는 무시무시해 보이기까지 한다. 바다코끼리들은 차킬레프의 오두막의 문을 부수고 안까지 들어온다. 그는 그 동물들을 기다란
빗자루로 부드럽게 밀어낸다. 바다코끼리는 이 남자를 무서워하지도, 위협하지도 않는다. 나갈 수 없게 된 차킬레프는 오두막 위의
지붕으로 올라가서 바다코끼리를 관찰한다.
세찬 바람과 바다코끼리의 울음소리로 가득한 해변가의 오두막에서 차킬레프는 고독한 유폐 생활을 견뎌낸다. 마침내 바다코끼리들이
떠나갔을 때, 그는 해안가에서 죽은 동물 사체들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긴다. 그는 이런 연구 활동을 10년 동안 해왔다. 이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2020년은 그의 연구 기간 중 가장 많은 바다코끼리 사체를 목격한 해였다. 그 원인은 바로 기후변화(Climate change)에 있다.
다큐멘터리의 제목 'Haulout'은 기각류(鰭脚類, pinniped mammal)가 쉬거나 짝짓기를 위해 잠시 머무는 장소를 뜻한다. 바다코끼리는
주로 얼음 지형에 머무른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북극 빙산이 녹게 되자 그 동물들은 해안가로 몰려들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많은 수의 바다코끼리들이 한 장소에 머물게 되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수의 바다코끼리들이 좁은 공간에서 서로 엉키고, 때로는
압사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해양 생물학자로서 차킬레프는 바다코끼리들의 음울한 현재를 목도하는 증인인 셈이다.
바다코끼리들이 떠난 해변을 걸으며 관찰하던 차킬레프는 죽은 암컷의 사체를 발견한다. 그 어미 곁에 새끼도 누워있었다. 그는
새끼도 죽었다고 녹음기에 말한다. 그 순간, 새끼 바다코끼리는 움찔거리며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비극과 신비로움이 공존하는 그
해변가에서 차킬레프는 고요히 홀로 앉아있다. 그의 뒷모습은 마치 독일 화가 Caspar David Friedrich(1774-1840)의 그림을 떠올리게 만든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에는
자연에 압도당한 한 남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인물이 바라보는 것은 인간이나 세상이 아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이며, 거기에는 숭고함이 깃들여져 있다. 그 그림 속의 남자처럼 차킬레프는 해변가에 앉아서 자신의 학문과 삶을 규정하는
바다를 응시한다. 그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지식과 신비의 영역을 탐구하는 수도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역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다른 그림 '바다의 수도사(The Monk by the Sea, 1808-1810)'와도 겹친다.
모든 바다코끼리가 떠났다. 마침내 고독한 연구자는 오두막의 문을 못질로 막아놓고 그곳을 떠난다. 그는 내년에도 그곳을 찾을 것이다. 이 간결한 다큐는 관객에게 관조와 명상의 시간을 제공한다. 우리들 대다수는 먹고 사는 일에 매여서 산다. 하지만 차킬레프처럼 자연과 진리에 매혹된 이들은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그 길은 돈이나 명예와는 거리가 멀다. 다큐 'Haulout'은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열정을 지닌 이들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그림 출처: en.wikipedia.org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바다의 수도사(The Monk by the Sea, 1808-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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