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itter Love(2020): 유람선 승객들을 통해 바라본 러시아 사회의 내적 공허
"결혼의 행복이란 이런 거야. 부부가 커피를 주문했는데, 남편이 아내의 찻잔에 설탕을 넣어주는 거야. 남편은 아내의 커피에 얼마만큼의 설탕을 넣을지 잘 알고 있지."
60대 여성인 율리아는 볼가강(Volga River)을 크루즈로 여행하고 있다. 율리아는 같은 선실을 쓰는 여자에게 그렇게
말한다. 율리아의 선실 동료는 점쟁이이다. 이 여성은 크루즈 여행객들에게 점을 봐주기도 한다. 율리아와 카드 점쟁이는 곧 친구가
된다. 싱글인 그들은 이 크루즈에서 마음에 드는 남성을 찾을 수 있을까? 폴란드의 다큐멘터리 감독 Jerzy Sladkowski는 3주 동안 볼가강 크루즈 여행객들을 따라간다. 'Bitter Love(2020)'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이 다큐에 나오는 여행객들의 주된 관심사는 '사랑'이다.
다큐는 매우 인상적인 도입부로 시작한다. 40대 중반의 옥사나는 크루즈에서 만난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옥사나는 신작 영화
'안나 카레리나'를 보았다고 말한다. 톨스토이 원작 소설 '안나 카레리나(Anna Karenina)'에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파멸에 이르는 여주인공 안나가 나온다. 여자는 안나의 삶에서 자신의 현재를 본 것일까? 옥사나는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도 언급한다. 자신이 그 소설에 나오는 개 '카시탄카' 같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하던 옥사나는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카시탄카(Kastanka)'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가난한 농가의 개 '카시탄카(Kastanka)'는 주인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카시탄카는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길을 잃는다. 카시탄카가 어쩌다 따라간 사람은 서커스를 하는 남자이다.
그 남자와 지내게 된 카시탄카는 서커스 개로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카시탄카는 살아남기 위해 묘기를 필사적으로 익힌다. 아마도
옥사나는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불쌍한 개 카시탄카의 모습에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옥사나는 남편과의
별거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자 앞에 앉은 대머리의 남자는 새로운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다큐 속 볼가강 크루즈는 마치 사랑의 유람선 같다. 크루즈 여행객들은 외로움에 지쳐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를 간절히 찾는다. 연인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류바와 샤샤 부부는 22년을 함께 했다. 그렇지만 부부의 모습은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류바는
남편이 수염 기르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남편은 류바의 말을 애써 무시한다. 미녀 성악가는 성악 코치인 남자 친구 세료자와 함께
여행 중이다. 세료자는 크루즈 승객들을 위해 멋진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 그 옆에서 여자 친구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참으로
보기좋은 커플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경력을 위해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율리아는 자신이 마시는 커피에 알맞은 설탕을 넣어줄 남자를 찾고 있다.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한 노신사가 율리아의 눈에 띈다.
율리아와 노신사는 곧 친해진다. 하지만 이 노신사는 겉만 번지르르하다. 율리아와 같은 방을 쓰는 카드 점쟁이는 노신사의 본질을
알아본다. 율리아는 상심한다. 괴로운 결혼 생활로 고통받았던 것은 카드 점쟁이도 마찬가지. 사랑 때문에 괴로운 사람은 또 있다.
옥사나와 같은 방을 쓰는 마르가리타이다. 마르가리타의 남자 친구는 아이가 있다. 마르가리타는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확신을 할 수 없다.
크루즈는 장대한 볼가강을 따라간다. 감독 Jerzy Sladkowski는 인간의 삶과 대비되는 자연의 풍광을 수시로 보여준다.
햇빛이 눈부시게 반사되는 볼가강의 수면은 잔잔하다.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들의 모습은 자유롭다. 승객들들은 각자가 지닌 괴로운 삶의
문제를 그러한 자연 속에서 성찰한다. 그리고 그 여행의 끝에서 관객은 그들이 찾아낸 나름의 답과 마주할 수 있다.
다큐 'Bitter Love'에서 인상적인 것은 크루즈 승객들의 이야기와 어우러지는 음악이다. 피아니스와 성악가, 그리고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을 들려주는 대머리 음유시인 아저씨까지, 이 다큐를 위해 일부러 섭외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거기에다
승객들이 보여주는 솔직함과 친밀함은 관객을 구경꾼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여행객으로 만든다. 'Bitter Love'는 사랑과
외로움, 관계에의 열망을 피상적으로 그려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Jerzy Sladkowski는 볼가강 유람선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 사람들을 통해 오늘날의 러시아인들이 직면한 내적 공허함을 드러낸다.
2. Vodka Factory(2010): 변화하는 러시아 사회, 주변부 여성의 초상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Jerzy Sladkowski는 변화하고 있는 러시아 사회의 예리한 관찰자이다. 이는 다큐 'Vodka Factory(2010)'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1000km 떨어진 시골 마을 Zhigulyovsk에는 Tatiana와 그녀의 딸 Valentina가 살고 있다.
22살인 발렌티나는 미혼모로 5살된 어린 아들 Danilo가 있다. 보드카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발렌티나에게는
꿈이 있다. 모스크바로 가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못하다. 버스 차장으로 일하고 있는 50살의 엄마
타티아나는 새로 만난 남자 친구와 살림을 차릴 생각이다. 발렌티나는 아들 다닐로를 타티아나가 보살펴주길 바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Vodka Factory'는 타티아나와 발렌티나를 통해 러시아 하층민 여성을 옥죄는 삶의 굴레를 보여준다.
보드카 공장에서 일하는 발렌티나에게 '보드카'는 생계의 방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보드카는 러시아 사회를 좀먹고
있다. 타티아나가 함께 하려는 새 남자 친구는 알콜 중독자임이 드러난다. '보드카'는 발렌티나를 비롯해 고단한 삶을 사는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손쉬운 위안이 된다.
발렌티나는 사진사에게 찍은 자신의 멋진 프로필 사진을 공장 동료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공장 동료들은 비웃음을 보낸다. 연기와
노래를 배우는 발렌티나의 필사적인 노력은 무모한 것으로 비춰진다. 미혼모로서 발렌티나가 처한 엄혹한 현실은 '배우'라는 꿈의
비현실성을 선명하게 부각시킬 뿐이다. 'Vodka Factory'는 가난한 시골 여성이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큐의 마지막에서 관객은 커다란 여행 가방을 짊어진 발렌티나가 길 위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타티아나는 남자 친구와 함께
하려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타티아나는 딸을 대신해 손주 다닐로를 보살펴야 한다. 이 어린 아이에게는 엄마가 간절히
필요하다. 하지만 다닐로의 엄마는 모스크바로 무작정 떠났다. 과연 발렌티나는 모스크바에서 배우가 되었을까? 타티아나는 어린 손주와
계속 살았을까? 아마도 그 시골 마을 보드카 공장에서는 여전히 여성들이 일하고 있을 것이다. 이 다큐를 보는 관객들은 타티나아와
발렌티나 모녀와 같은 삶의 여정을 지금도 누군가 걸어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마치 잘 연출된 한 편의 영화 같은 이 다큐는 주변부 여성의 삶이 인습적 사회 구조와 충돌하는 지점을 포착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사진 출처: dokweb.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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