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변두리 동네의 어느 작은 주점. 주인 여자는 마흔을 좀 넘겼을까? 얼굴은 곱상한데 어딘가 그늘이 져있다. 여자는 나이든
동네 영감들 추근대는 것도 일상이라는듯 눙치며 받아넘긴다. '은희네'라는 가게 이름은 여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자는 이
자리의 가게를 인수해서 그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 가게 내부의 인테리어는 낡고 촌스럽다. 군데 군데 얼룩이 있는 자주색 소파며,
터진 가죽 의자는 튀어나온 스펀지 조각도 보인다. 어쩌면 유행에 뒤처진 그런 촌스러움이 오히려 사람들을 복작거리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게에 오는 손님들 가운데에 주인 여자의 정확한 나이나 고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해서 그려본 이 주점은 가수 방실이의 '서울 탱고(1990)'에서
영감을 받았다. 방실이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노래 속 여인에 대한 애잔함 속에 1990년대 서울의 주변부
풍경이 선연히 겹친다. 나름의 꿈을 가지고 서울에 왔지만 인생의 불운이 겹쳐서 영락해버린 중년의 술집 여자. 이 여자에게
서울이란 도시는 부서진 꿈의 잔해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웃음과 술을 팔 뿐,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심을 내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아무것도 묻지 말고 술이나 드시고 가라'고 부드럽게 말한다.
방실이의 '서울 탱고'가 보여주는 좌절과 관조의 정서는 이 노래를 향유하는 이들의 연령대와 겹친다.
중년의 청자들에게 인생은 더이상 이룰 꿈이 있거나 뭔가 대단한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매일의
일상을 허덕이며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편안한 동네 술집에서 한잔 술에 그날의 피로를 잊는 것이 소소한 삶의 기쁨이 된다. '서울
탱고'에는 닳아버린 꿈의 자락을 붙잡고 살아가는 여자가 전면의 풍경에 등장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익명의 소시민이 '손님'이라는 배경으로 포개어져 있다. 이 노래의 정서에 공명하는 이들은 주점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자신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서울 탱고'가 나오기 2년 전인 1988년, 조용필은 자신의 10집 앨범에 '서울 서울 서울'을 싣는다. 이 노래에서 1988년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의 잔상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올림픽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중진국의 대열에 합류했음을 알려주는 국가적 행사였다. 조용필은 올림픽 개최 도시 서울에 세련된 도회지 남성의 애수를 덧입힌다. 노래
속 화자로 등장하는 남자는 해질 무렵 도시의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이 남자는 적어도 먹고 사는 일에 매몰된 주변부 하층민은
아니다. 남자는 여유있게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지나간 사랑을 회상한다. 아름다운 서울의 거리는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간절하게 만든다.
당시 서울의 풍경은 '서울 서울 서울'의 노래 속 아름다운 거리로 각인될 수 없었다. '달동네'로 부르는 전형적 서민의 주거지가 서울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김동원의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1988)'은 조용필의 노래가 보여주지 않는 서울의 그늘진 뒷모습을 직시한다. 그
다큐는 올림픽 때문에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이들의 고통과 울분을 기록한다. 도시 개발이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통제되지 않은
공권력은 서민의 삶을 짓밟았다. 상계동에서 내쫓긴 주민들은 경기도 부천으로 갔으나, 그곳마저 올림픽 성화가 지나간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다.
대중가요 속 서울의 이상화된 모습은 '서울 서울 서울'이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 길옥윤이 작사 작곡하고 패티 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1969)'는 그야말로 관제 가요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노래
속 화자는 서울의 거리에서 사랑과 희망을 노래한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연인들은 미래를 약속한다. 그곳에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화자에게 서울은 꿈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서울은 헤어진 연인만저도 다시 돌아와야할 매력적인 도시로 그려진다.
이미자가 1968년에 발표한 '서울이여 안녕'은 어떤 면에서 '서울의 찬가'와 극도로 대비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노래의
화자는 아마도 시골에서 올라온듯한 앳된 아가씨이다. 여자는 서울에 간다며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서울에 왔다. 하지만 남자의
마음은 이미 돌아섰다. 변심한 연인에게 상처받은 여자는 서울을 떠나며 눈물을 흘린다. 노래는 서울에 오기까지 여자의 쉽지 않은
여정은 알려주지 않는다. 이 시골 아가씨에게 결국 서울은 애달픔을 안겨준 비정한 도시가 된다. 서울은 가진 것 없는 이 시골 아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의 차가운 이미지는 '이별'이라는 상실의 사건과 겹쳐지며 증폭된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개발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서울'이란 도시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강렬하게 투사된 곳이었다. 이미자가 노래한 '서울이여 안녕' 속의 아가씨는 1970년대 서울의 버스 차장, 여공, 가정부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방에서 상경한 하층민들은 서울의 시민이 되기 위해 분투했다. 1980년대에 서울은 이제 들끓는 물질적 욕망의 전시장이 된다. 서울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부동산 광풍의 진원지였다. 마민지의 다큐 '버블 패밀리(2017)'는 감독 자신의 가족사와 1980년대 서울의 부동산 개발사를 선명하게 겹쳐놓는다. 김운경 극본의 TV 드라마 '서울의 달(1994)'은 서울의 밑바닥 인생들을 처연히 응시한다. 한석규가 열연한 '홍식'이란 인물의 비극적 최후는 서울이란 도시의 계층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서울은 여전히 서민들에게는 힘든 생존의 터전이다. 자이언티(Zion.T)의 '양화대교(2014)'는
소년의 목소리를 빌어 그 삶의 고단함을 노래한다. 노래 속 화자인 어린 소년은 '양화대교'를 가슴저리는 추억의 장소로 회상한다.
소년의 아버지는 택시 운전 기사이다. 늘 집을 혼자 지키는 어린 소년은 돈 버느라 바쁜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면 아버지는 '양화대교'에 있다고 말한다.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고 다짐하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어 그
다리를 지나간다. 그와 그의 가족은 그렇게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남았다. 노래 '양화대교'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회색 도시에 소시민적인 행복, 가족애라는 따뜻한 색채를 덧입힌다.
올해 서울시에서 새롭게 내놓은 서울의 시정 브랜드는 '서울, 마이 소울(Seoul, my soul)'이다.
언젠가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영혼의 충만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누군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서울의 방 한 칸'에 대한 끈질긴 근원적 욕망을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소울은 너무나도 물질에 매몰되어 있으며,
그런 면에서 나에게 서울의 새로운 브랜드는 기묘한 울림을 준다.
*본문에 언급된 노래들의 가사
방실이- 서울 탱고(1990)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 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https://www.youtube.com/watch?v=ZqLrPLiqgGE
이미자 - 서울이여 안녕(1968)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그리운 님 찾아 바다 건너 천리 길
쌓이고 쌓인 회포 풀려고 왔는데
님의 마음 변하고 나 홀로 돌아가네
그래도 님 계시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아득한 옛날 어려운 일 이기고
백년을 같이 하자 맹세를 했는데
세월이 님을 앗아 나 혼자 울고 가네
그래도 님 계시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https://www.youtube.com/watch?v=DHNnpIL-JJ8
조용필 - 서울 서울 서울(1988)
해질 무렵 거리에 나가 차를 마시면 내가슴에 아름다운 냇물이 흐르네
이별이란 헤어짐이 아니었구나 추억속에서 다시 만나는 그대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손
그 언제쯤 나를 볼까 마음이 서두네 나의 사랑을 가져가 버린 그대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워워워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차한잔을 함께 마셔도 기쁨에 떨렸네
내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여 눈물 속에서 멀어져가는 그대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거리 서울 서울 서울 그리움이 남는곳
서울 서울 서울 사랑으로 남으리 워워워 never forget of my lover 서울
패티 김 - 서울의 찬가(1969)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얼굴
그리워라 내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마오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봄이 또오고 여름이 가고 낙엽은 지고 눈보라쳐도
변함없는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마오
헤어져 멀리 있다하여도 내품에 돌아오라
그대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