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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자작시: 겨울 풍경

  겨울 풍경 엊그제 아파트 앞에서 조그만 꼬마가 눈사람 만드는 것을 보았다 꼬마의 아빠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옆에서 아이가 눈덩이 만드는 것을 격려해 주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꼬마가 만든 5단짜리 눈사람이 예쁘장하게 화단에 세워져 있었다 나뭇가지 팔에다가 머리에는 솔잎으로 장식된 모자까지, 어린 것이 참 열심히도 만들었다 물론 다음날에 그 눈사람은 다 허물어져 버렸지만, 아이가 지 아빠와 함께 만든 눈사람의 추억은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베란다 앞쪽 나무에 무언가 검은 봉지 같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바람이 하도 부니까 비닐봉지가 날아가다가 걸린 모양이다 싶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게 아니었다 진회색의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나무 위에서 몸을 동글게 하고는 추위를 견디면서 자꾸만 움찔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쟤들도 겨울을 나려면 힘들겠네 잔뜩 부풀린 깃털에다 고개를 파묻던 산비둘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날아가 버렸다 비둘기가 앉았던 나무 아래 있는 그네에서는 젊은 애기 엄마가 어린 딸을 데려와서 그네에다 앉히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이제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빨간 코트를 입은 아가는 아직 지 힘으로 그네에 앉질 못했다 애기 엄마는 겨우 딸아이를 그네에 앉히고 두 팔로 그네를 잡게 했다 아기는 얌전히 앉아서 흔들흔들 그네를 탔다 그 앞에서 여자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한참 동안 딸이 그네 타는 것을 찍었다 그래, 저렇게 좋은 때도 다 잠깐이지 시계는 어느덧 오후 5시를 가리켰다 그런데 날이 그리 어둑어둑하지 않았다 아, 동지(冬至)가 지났구나 이제 낮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자작시: 흉터의 사회학

  흉터의 사회학 얼마 전에 길을 걷다 심하게 넘어져서, 아직도 계속 치료를 받고 있다 찢어진 입술은 봉합사를 제거했지만, 약간의 통증이 느껴진다 타박상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그래도 얼굴의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더이상 듀오덤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상처 부위가 우툴두툴하고 붉은색으로 변해서 그대로 두면 흉터가 생길 것 같았다 검색을 해보니 가장 잘 알려진 연고가 더마틱스 울트라, 였다 이 외산 연고는 가격이 무척 비쌌다 연고, 라고 하니까 의약품 같지만, 놀랍게도 이 연고는 의료기기로 취급된다 그래서 인터넷으로도 구매할 수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파는 곳이 있어서 주문하려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정가의 거의 반값에 팔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리뷰에다 누군가 짝퉁이니 사지 말라고 써놓았다 이런 연고도 짝퉁이 있나? 그랬다 사악한 자본주의적 창의력이 넘치는 대륙의 판매자들이 흉터 방지 짝퉁 연고를 직접 조제해서 팔고 있었다 싸다고 양잿물을 먹을 수는 없지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 짝퉁 연고의 성분은 무엇일까? 진짜 연고의 제형을 흉내내기 위해 알로에 겔, 뭐 그런 거에다 물을 섞나? 그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참으로 요상한 짝퉁의 세계였다 겨우 손가락 크기만 한 연고가 3만 원을 훌쩍 넘기는데, 이걸 또 두세 달을 발라주어야 효과가 있다고 한다 흉터는 질병이 아니라 미용의 영역에 해당하므로, 그걸 치료하는 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몫이다 그러니까 그 비싼 연고를 사서 바를 여력이 없는 사람은 흉터와 색소침착을 그냥 감수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니, 흉터라는 것이 얼마나 적나라한 사회적 계층성을 드러내는 것인지 몸서리가 쳐지는 것이었다        

자작시: 고구마, 인생

    고구마, 인생 어제 고구마 상자를 살펴보다가 썩은 고구마를 발견했다 고구마는 잘 썩는다 더럽게도 잘 썩는다 그래서 매일 고구마를 만지고 살펴보면서 썩은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런데도 고구마가 썩어가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 고구마 상자를 정리하면서 고구마를 모두 깎아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가만 보니, 겉으로는 멀쩡하게 생긴 것도 조금씩 썩어가고 있었다 문득, 얼마 전에 고구마 상품평 읽다가 발견한 고구마 농장 집 아들의 댓글이 떠올랐다 댓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1. 고구마는 난대성(暖帶性) 작물이다. 따뜻한 곳에다 보관하라 2. 겨울철 날씨에 고구마는 배송 과정에서 냉해를 입는다. 반드시 3kg 정도의 소량으로 주문하라 3. 일단 고구마를 받으면, 따뜻한 방에다 사나흘 고구마를 펼쳐둔다 그래야 고구마가 숨을 쉬고 썩지 않는다 참으로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댓글이었다 나는 그걸 읽으면서 그 농장 집 아들은 고구마를 그냥 먹을거리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고구마, 숨을 쉬는 고구마, 추운 날씨에 오들오들 떨다가 냉해를 입는 고구마, 무슨 고구마 보관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야 할 판이었다 결국 그렇게 신경을 써서 보관을 했건만, 우리집의 고구마는 썩어가고 있었다 고구마처럼 썩어가는 줄도 몰랐던 내 인생, 누군가 고구마가 왜 이렇게 잘 썩느냐고 불평하자 댓글로 달린 어느 작가의 소설에 나온 글귀는 그러했다 나는 고구마의 썩은 부분을 깎아내면서 그 작가의 통렬한 비유에 감탄했다 인생의 많은 것들은 고구마 껍질의 안쪽처럼 알아보기 어렵게 가려져 있다          

자작시: 자비 출판(自費出版)

자비 출판(自費出版) 자비 출판은 자기 돈으로 자기 책을 찍어내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하다 보니 최근에 내 손에 들어온 자비 출판 서적이 세 권 있었다 그 책들은 모두 신앙 서적이었다 하나는 신부님이 쓴 시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녀님이 쓴 자서전, 나머지 하나는 평신도가 쓴 신앙 수필집이었다 나는 그 책들 모두 단 한 장도 읽지 않았다 그걸 나에게 선물해 준 분에게는 참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이지 읽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읽지도 않을 책을 그냥 쌓아두기도 뭐했다 그렇다고 이걸 폐지 더미에다 버리는 것도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궁리 끝에 나는 그 책들을 아파트의 출입구 쪽에다 두었다 혹시라도 신앙 서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면 좋겠다는 뜻에서였다 며칠 새에 책들이 사라지기는 했는데, 내 생각에는 그 책들이 누군가 읽고 싶은 사람이 가져간 것이 아니라 청소하는 아줌마가 모아두었다가 재활용 분리수거하는 날에 버렸을 것 같다 자비 출판으로 나온 책들의 마지막은 대개가 저러하겠거니 싶어서 마음이 서늘해졌다 어떻게든 제대로 된 출판사에서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야지 작년에 이런저런 공모전에 글을 써서 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적어도 어디에 뽑힌 이력이라도 한 줄 있어야 책을 쓸 기회를 얻을 수도 있지 자본주의란 더럽게도 정직한 것이다 글을 쓰려는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이 팔릴만한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니까 그런데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의 안온한 선택이 자비 출판이다 일단 ISBN이 책 뒤표지에 찍힌 자비 출판 책을 내면 작가 신인으로서의 등단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책을 안내면 안냈지 자비 출판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나는 어디론가 사라진 세 권의 자비 출판 책들의 음울한 끝을 상상해 보고는 다시금 다짐하게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