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자작시: 노란 생두

  노란 생두 항아리에 넣어둔 생두를 꺼낸다 가위로 살짝 봉지를 자르자 진공이 풀리면서 생두가 쏟아진다 아니, 생두가 노란색이야 원래 신선한 생두는 초록색에 가깝다 나는 생두 봉지의 포장 일자를 본다 2015년 4월, 세상에, 10년이란 시간이 어쩌면, 생두는 봉지의 희박한 산소를 들이키며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늙어버린 사람의 누렇게 뜬 얼굴, 생기도 없고 향기도 없는, 내다버릴까 잠깐 생각을 해본다 먹는 거 버리면 죄를 짓는 거야 그래, 어쨌든 볶아보면 알겠지 그런데 어쩌다가 10년을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대체 왜 그랬을까? 노란 생두를 신문지에 좌르륵 펼쳐놓고 결점두를 골라낸다 벌레 먹은 것, 곰팡이가 생긴 것, 자라다 만 것, 깨어지고 못생긴 것들, 나는 머나먼 인도네시아의 커피 농장을 그려본다 구름이 흐르고, 안개가 낀, 내가 알지 못하는 땅의 소리, 농부는 커피 농사에 별 재주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니며, 열정이란 것은 결국에는 버려지기 마련이지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단한, 나는 너무 많은 쉼표를 찍고 있어 10층의 남자는 어제 아침에도, 오늘 낮에도 담배를 피우러 나오더군 목요일과 금요일은 평일, 직업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구하는 중인지, 직업이 없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돈을 벌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무직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던 스님은 그렇게 대답한다 노란 생두에서 마대 자루의 털실 하나를 발견한다 털실을 볶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군 오래된 생두를 볶아 먹어도 죽지는 않아요 물론 먹으라고 권유할 수는 없죠 하지만 한번 그 생두를 볶아서 커피를 내려보세요 거기에도 그 나름의 맛이 있을지도요 세월의 맛 같은 자신을 카페 주인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블로그에 그렇게 써놓았다           
최근 글

자작시: 갈림길

  갈림길 어긋난 갈림길에서 나는 울었네 돌아갈 수 없으므로 벚꽃은 네모난 창에 갇혀있고 바람이 나무를 후들겨 팰 때 꽃이 피는 날은 그리 길지 않아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 알았다면 천천히 뒤돌아서 눈에 담아둘 것을 눈물은 뼛속 깊이 흘러 멍을 만들고 아마도 오랫동안, 아니 영영 말하지 않겠다고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 거짓말이지 누구나 거짓말을 해 이렇게 또 갈림길에서 뛰어가지 않겠어 한번 넘어진 뒤로는 그래도 가볍게 슬리퍼를 흙바닥에 스치면서 넘어지지 않는 법을 생각하지 벌써 지고 있는 벚꽃을 밟지 않으려고 갈림길에서는 누구나          

자작시: 공모전(公募展)

공모전(公募展) 인삼차와 우롱차를 섞으면 무슨 맛이 나는지 아니? 그게 말이지 인삼차가 이겨 인삼이 힘이 좀 센 거 같아 우롱차는 좀 매가리가 없는 모양이지 그런데 인삼차도 이기지 못하는 맛이 있어 치약맛, 이 빌어먹을 치약은 계속해서 물을 들이키게 만들거든 아무래도 버려야겠어 치약을 버리려니까 진짜 아깝네 이걸 어디에다 써먹을 데나 있는지 스뎅 그릇 때깔이나 나게 만들 때나 쓸까? 그러고 보니 오늘 시를 재활용했군 공모전의 마감일이었는데 말이야 이전에 떨어진 공모전의 시들을 그러모아서 다시 냈거든 한번 안된 거 또 안되라는 법 있어? 심사위원이 다를 수도 있잖아 이 공모전이라는 게 그래 심사위원 취향까지 연구 해야 해 나 원 참 더러워서 어디서 들으니 공모전 첨삭 전문 시 선생도 있다 그러더군 첨삭 비용은 얼마나 받아먹는 걸까? 그런데 진짜 궁금하기는 해 시란 무엇인가? 아니, 시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가? 시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딴 걸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하자 어차피 인생은 그냥 운빨일 뿐이지 밤마다 잠이 들 때 아주 간절히 기도는 해 좋은 꿈을 꾸자 그 좋은 꿈이 꾸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지 첨삭 선생의 더러운 빨간펜 따위는 무시하기로 하자 알러지 때문에 눈이 퉁퉁 붓고 가려워 안과 의사가 처방해 준 안약이 참 용하지 그거 단 한 방울, 눈에 넣었더니 눈이 안아파 인생도 그렇게 아프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네 어차피 되지도 않을 시를 또 재활용해서 내고 말았어 재활용은 참으로 누추한 단어야 거룩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재활용품을 찬미하면서도 은근히 경멸하지 인생이 재활용되지 않는 것이 유감이군 새롭게 리셋, 리부팅, 리뉴얼, 리사이클, 리모델링, 시, 공모전 

자작시: 생일

    생일 미역국을 맛있게 끓이려면 잘 불린 미역을 참기름에 달달달 볶아야해 오래전, 엄마는 나에게 그렇게 미역국 끓이는 비법을 알려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엄마에게 물었더니, 막내딸 생일이라고 말한다 아니, 아니 내 생일이야, 그걸 잊어버리면 어떡해 그러냐, 그렇구나, 네 생일이구나 미역국도 못 끓여주고,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엄마가 그렇게 말할 때, 하얗고 긴 콧털이 보였다 나는 작은 가위로 엄마의 콧털을 잘라주었다

자작시: 통바지를 입는 방법

  통바지를 입는 방법 오늘 낮의 기온이 27도를 찍었어 3월 말, 이 봄의 날씨는 중간이란 게 없어 젊은 남자는 반팔에 반바지를 입었고, 머리가 휑한 늙은 영감은 오리털 잠바를 입고 구부정하게 걸었어 젊은 여자들의 옷차림은 다 비슷해 죄다 통바지더군 뚱뚱한 여자도 늘씬한 여자도 모두 통바지야 거리의 먼지를 차근차근 쓸어가면서 바쁘고 신나게 걸어가 나는 며칠 전에 주문한 청바지를 떠올렸어 분명히 스트레이트핏이라고 했는데 받아보니 이건 영락없는 통바지야 넓어, 넓다고 이걸 어떻게 입고 다니라는 거야 나는 스키니도 싫지만 통바지도 싫어 그런데 이 유행이란 것은 말이지, 들불처럼 번지는 질병같은 거야 모두들 그 병에 걸리고 말거든 반품해버릴까? 반품비 6천 원이 목에서 까끌거리면서 소리를 내길래, 그냥 삼켰어 어떻게든 입으면 되지 않을까? 나의 버스는 정류장을 하나씩 지나가 나이든 늙은 여자들은 통바지 따위는 입지 않더군 그들은 잘 알고 있어 넙데데한 바지는 걷기에 거치적거리고 먼지만 주워 담을 것이라고 나는 늙어가고 있어 무작정, 마구마구 그런 내가 통바지를 입고 다닐 수 있을까? 일단 바지에 두 다리를 넣어 그리고 숫자를 세는 거야 하나, 둘, 셋, 시간을 그렇게 거슬러 나의 젊은 날로 가는 거지 젊다는 건 깡패와도 같지 거적때기만 걸쳐도 패션이라고 우기면 되거든 하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지 타임머신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어 너, 내가 산 청바지 입어볼래? 통바지야 요새 유행하는 거라고 아니, 난 청바지가 어울리지 않아 안 입는 게 좋겠어 할 수 없군 다시 한번, 새 청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서서는 이렇게 주문을 걸어 통바지가 잘 어울려 갑자기 눈이 가려워 내 오른쪽 눈, 다래끼가 난 것 같아 거짓말을 하면 생기는 다래끼가   

자작시: 나무, 베어지다

  나무, 베어지다 아침 8시, 눈이 떠진다 웅웅거리는, 방바닥을 울리는 소리, 그날이구나 오늘은 이 아파트의 33년 된 백합나무가 사라지는 날이다 나는 나무의 아픈 울음소리를 듣는다 나를 베이게 만든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니 나무가 33년을 살았으면 영물(靈物)이라는 말을 쓸 법도 하지 그런 나무를 낙엽을 많이 떨군다고, 뿌리가 배관을 휘감는다고 베어버린다는군 나무를 베는 것도 순서가 있어 우선 잔가지들을 잘라내고 그다음에 윗부분을 자르고, 그리고 중간, 마지막으로 밑동을 베는 것이지 나무의 사지는 산산조각이 나서 철저히 찢기지만 피 한 방울도 튀지 않고 신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하루 종일 이상한 오한을 느낀다 타이레놀을 하나 꿀꺽, 삼키고는 발골(拔骨)하듯 차례차례 바수어지는 나무를 본다 덩그마니 남은 밑동들, 동그랗고 정갈한, 나는 너희들에게 바람 소리와 그늘과 때로는 눈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가느다란 통로를 내주었거늘, 이렇게 나를 베어내는구나 나무는 안녕, 이라는 말 대신에 저주를 퍼붓고는 사라진다 제일 큰 백합나무의 윗쪽에 있던 까치집도 허물어졌다 나는 까치가 알을 낳았을까 궁금해진다 사람도 아파서 죽어나가는데 그까짓 까치의 알 따위, 관리사무소에 까치가 새끼를 낳아 기를 때까지 벌목 일정을 미룰 수 없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사람이 정이 많으면 못써 살기가 어려워 이 험한 세상, 그래도 살아내려면 독기(毒氣)가 있어야지 단 한 방울지라도, 나는 내 안의 독기를 가만히 헤아려 본다 늙음을 견디는 독기, 가난을 견디는 독기, 바스라지는 꿈의 잔해를 응시하는 독기, 뿌리 없는 것들을 멸시하는 독기, 그런 독기가 없어서 삶은 서러웠고 눈부셨으며 무작정 아팠다 오늘 베어지는 나무처럼        

자작시: 눈비에 지워진 그 글씨

  눈비에 지워진 그 글씨 여자는 놀이터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서 걸어갔다 그리고는 미끄럼틀 앞에 서더니, 거기에 쌓인 눈을 잠깐 들여다 보고는 손가락으로 죽죽 글씨를 써내려 갔다 눈발이 미친듯이 휘날리고 있었다 베란다 창밖으로 눈이 오는 것을 내다보던 나는 여자가 대체 거기에다 뭐라고 썼는지 궁금해졌다 저런 건 조그만 애들이나 하는 장난 아닌가? 이십 대 후반이나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그 여자는 그렇게 눈 위에 글을 써놓고는 휘적휘적 커다란 보폭의 걸음을 내디디며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슨 글을 썼을까? 나는 어떻게든 나가서 그 글씨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구태여 그 글씨를 보기 위해 따뜻한 집을 떠나는 일은 귀찮기도 했다 어쨌든 있다가 나가 봐야지 곧 눈이 비가 되고, 글씨는 물이 되어 놀이터의 흙바닥에 스며들었다 아쉽군 여자가 뭐라고 썼는지 알고 싶었는데 말이지 아무개야, 사랑해! 아니면, 부자 되게 해주세요 같은 것이었을지 아,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다만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워진 글씨, 나는 새삼스럽게 그를 떠올린다 그에게 하지 못했던, 아니 할 수 없었던 어떤 말에 대해서, 내 머릿속에서 마구 엉켜 휘날리는 눈발, 나는 곱은 손으로 글씨를 써내려 간다 시간이, 오래되고 아픈 시간이 그 글씨를 지워나가는 것을 본다 그는 나의 글을,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말을 영영 알지 못한다 내 머리가 차디찬 땅에 뉘여질 때 그는 알게 되리라 눈비에 지워진 그 글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