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월, 시금치는 단맛을 잃어버렸지 추운 겨울을 견디려 단맛을 만들어내는 패기 따위, 이 봄날에는 필요 없어 꼬막도 이제 끝물이야 쪼그라든 꼬막살을 발라내면서 다시, 내년 겨울을 기약하는 거야 추울 때, 살을 불리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데 손등은 쩍쩍 갈라지면서 가는 피가 흘러 왜 봄에도 부드러움이 스며들지 못할까, 내 손은 오랫동안 그랬어 발도 시려워 조그만 아이가 정신없이 뛰어다녀 흩날리는 벚꽃잎을 잡으려고 얼빠진 애비는 벚꽃 나무 옆의 소나무를 흔들어 너에게 꽃잎을, 이 봄을 주겠노라 나무의 비명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남자의 치열한 이기심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애새끼는 마구 소리를 지르는데 벚꽃잎은 수직으로 솟구쳐 멀리, 멀리, 멀리, 문득, 내 핏속에 흐르는 아버지의 유언, 너는 글을 쓰는 게 좋겠구나 아빠, 내가 언젠가는 유고 시집(遺稿詩集)을 낼 수 있을지도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하지만 죽음은 항상 빨리 도착하지 엄마, 오래전 수술 자국이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은데, 오늘은 그렇구나 방금, 내 왼쪽 귀가 따끔, 그렇게 신호를 보냈거든 내일은 비가 올 거야 8년 전에 다친 신경이 눈을 찡긋거리면서 아파트 출입구에서 4시간째 죽을힘을 다해 손 세차를 하던 남자는 만족한 표정으로 차를 타고 떠나는군 저 인간은 내일 비가 온다는 걸 몰라 흐리고 어리석은 미래가 뒤엉킨 4월
노란 생두 항아리에 넣어둔 생두를 꺼낸다 가위로 살짝 봉지를 자르자 진공이 풀리면서 생두가 쏟아진다 아니, 생두가 노란색이야 원래 신선한 생두는 초록색에 가깝다 나는 생두 봉지의 포장 일자를 본다 2015년 4월, 세상에, 10년이란 시간이 어쩌면, 생두는 봉지의 희박한 산소를 들이키며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늙어버린 사람의 누렇게 뜬 얼굴, 생기도 없고 향기도 없는, 내다버릴까 잠깐 생각을 해본다 먹는 거 버리면 죄를 짓는 거야 그래, 어쨌든 볶아보면 알겠지 그런데 어쩌다가 10년을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대체 왜 그랬을까? 노란 생두를 신문지에 좌르륵 펼쳐놓고 결점두를 골라낸다 벌레 먹은 것, 곰팡이가 생긴 것, 자라다 만 것, 깨어지고 못생긴 것들, 나는 머나먼 인도네시아의 커피 농장을 그려본다 구름이 흐르고, 안개가 낀, 내가 알지 못하는 땅의 소리, 농부는 커피 농사에 별 재주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니며, 열정이란 것은 결국에는 버려지기 마련이지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단한, 나는 너무 많은 쉼표를 찍고 있어 10층의 남자는 어제 아침에도, 오늘 낮에도 담배를 피우러 나오더군 목요일과 금요일은 평일, 직업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구하는 중인지, 직업이 없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돈을 벌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무직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던 스님은 그렇게 대답한다 노란 생두에서 마대 자루의 털실 하나를 발견한다 털실을 볶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군 오래된 생두를 볶아 먹어도 죽지는 않아요 물론 먹으라고 권유할 수는 없죠 하지만 한번 그 생두를 볶아서 커피를 내려보세요 거기에도 그 나름의 맛이 있을지도요 세월의 맛 같은 자신을 카페 주인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블로그에 그렇게 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