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 Burnham: Inside(2021) 1시간 27분
Eighth Grade(2018) 1시간 34분
Make Happy(2016) 1시간
1. 시작, 'Bo Burnham: Inside'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의 단편 소설 '여학생'. 서른 살의 남성 작가는 십 대 여학생에 빙의한 것처럼 글을 써내려갔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여학생의 내면 풍경은 너무나도 사실적이라 읽는 이들을 놀라게 만든다. 미국의 스탠드 업 코미디언 Bo Burnham의 2018년작 영화 'Eighth Grade'를
보면서 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떠올렸다. 27살의 청년은 8학년(우리나라의 중학 3학년에 해당) 여학생 케일라의 내면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그려낸다. 코미디언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처음엔 별생각 없이 영화를 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등을 곧게 펴고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이 젊은 친구의 진정한 재능은 코미디가 아니라 영화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작은 'Bo Burnham: Inside(2021)'였다.
Covid-19 전염병이 휩쓰는 시기에 번햄은 LA 집 작업실에서 자기 혼자 공연한 영상들을 그러모았다. 이 작품의 구성 방식은
간명하다. 각각의 소주제가 있고, 번햄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을 부른다. 때로 독백과 해설도 들어간다. 단순한 틀 안에서 그가
다루는 주제들은 매우 다양하다. 번햄이 주의깊게 다루는 부분은 인터넷 문화이다. 백인 여성이 올리는 흔한 인스타그램에 대한
뒤틀린 유머, sexting을 비롯한 SNS의 일그러진 단면, 아마존의 수장 제프 베이조스에 대한 신랄한 풍자... 물론 그
비판과 풍자의 중심 소재는 자기 자신이다. 번햄은 자신의 경력에 대한 자조적 성찰, 고립된 상황에서 겪는 불안과 우울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젊은 친구가 혼자서도 잘 노는구만!'하고 큭큭거리며 'Bo Burnham: Inside'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좀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인사이드'에서 그가 부른 자전적 노래 'Problematic'과 '30'에
짤막하게 드러난 부분이 있기는 하다. 잘 나가는 코미디언이었는데 공황 장애가 왔고, 그 때문에 활동을 쉬어야만 했다. 'Make Happy(2016)'는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찍은 1시간짜리 스탠드 업 코디미 공연 영상물이다. 거기에는 '인사이드'를 만들어낸 번햄의 창작
원리랄지, 주요 관심사가 들어있다. 인종과 성을 주제로 하는 거침없는 유머, 자신에 대한 자학적인 풍자, 직접 창작한 랩을 비롯해
여러 장르의 노래를 소화하는 가창력. 'Make Happy'는 유튜브에 올린 영상으로 16살에 스타덤에 오른 번햄의 저력이
무엇인지를 입증한다. 그 작품은 이렇게 외치는 것만 같다. 'Welcome to Burnham World!'
2. Bo Burnham, 8학년 케일라가 되다!
쉬는 기간에 만든 'Eighth Grade(2018)'는
번햄의 첫 영화 연출작이었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8학년 여학생 케일라가 인스타그램에 올릴 동영상을 찍는 것을 보게 된다.
차분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케일라. 또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상물에서 케일라는 주변 친구들의
시선이나 말에 신경쓰지 말고 의연하게 행동하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정작 케일라 자신은 학교에서 '은따(은근한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신세이다. 말수가 거의 없어서 반에서 '가장 조용한 애'로 뽑히기까지 한 케일라. 한마디로 존재감 없는 주변부 청소년의
전형적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떡하면 나도 애들의 관심을 받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케일라의 '자신감 동영상'은 현실 은따의 이상화된 가상
캐릭터가 펼치는 공연인지도 모른다. 케일라는 틈만 나면 자신의 동영상을 올리고 조회수를 확인한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에서도
케일라는 쩌리 신세이며, 그 누구도 케일라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케일라는 강박적으로 인스타에 매달린다. 인기있는
애들을 팔로우하고 끊임없이 '좋아요'를 누르는 것은 역설적으로 얼마나 이 아이가 애정과 소통을 갈구하는지를 입증한다.
번햄은 십 대 시절에 이미 유튜브로 스타가 된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인터넷과 대중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이로서 '가상 공간'에
대한 탐구는 그의 주요한 관심사일 수 밖에 없었다. 'Eighth Grade'의 케일라는 어떤 면에서는 번햄의 열화(劣化)된
캐릭터이기도 하다. 갑작스럽게 정점에 올랐던 코미디언은 칩거의 시간에 들어갔고, 심리적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인사이드'는 다시 대중과의 접점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필사적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8학년이 된 번햄 '케일라'의 일상에 신나고 재미난 일은 하나도 없다. 싱글 파더인 아버지와는 데면데면하고, 학급의 퀸인
케네디에게 늘 무시당하고, 좋아하는 남자애 에이든은 케일라를 성적인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인터넷과 SNS는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케일라의 실질적 조언자, 전자 스승이 된다. 번햄은 십 대 청소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 무시무시한 매체를
집요하고 깊이있게 탐구한다. 가상 공간에서의 소통과 관심에 대한 강박적 열망은 오히려 현실 세계의 인간 관계를 차단시켜 버린다.
케일라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과의 소통을 바라는 아버지의 대화 시도를 번번이 거부한다.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케일라의 힘겨운 투쟁은 고등학생 라일리와의 만남에서 위기를 맞는다. 라일리는 '진실 게임(truth or
dare)'을 빙자해 케일라에게 성적인 요구를 한다. '싫다'는 감정과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사이에서 케일라의 내면은
극렬하게 요동친다. 이 영화에서 케일라가 유일하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표현하는 그 장면에서 케일라는 소리친다. 'No!'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도 케일라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해서 한다. 그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을 통해 케일라는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운다.
번햄은 청소년기의 주요한 특징인 '자기 중심성(Adolescent egocentrism)'이
인터넷이라는 매체와 긴밀히 결합한 현시대의 초상을 그려낸다. 전자 음악 작곡가 Anna Meredith가 담당한 음악은 그러한
주제를 잘 부각시킨다. 음악과 사운드는 케일라의 내면과 계속해서 공명한다. 케일라가 가슴이 뛰거나 놀라움을 느낄 때, 배경에
깔리는 음악 또한 과도하게 음량이 커진다. 그런가 하면 케일라가 너무 힘들고 괴로워하는 장면에서 사운드는 꺼진다. 라일리의 차에서
내린 케일라는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며 집에 들어온다. 놀란 아빠가 케일라를 진정시키는 동안 관객은 무음으로 처리된 화면
속의 두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Middle school wasn't so great for me, but I'm past it now. And I'm
moving forward, and you can do that too with high school if it didn't go
great."
(중학교 시절은 사실 좀 별로였죠. 하지만 이젠 다 지나갔어요. 난 계속 나아갈 거고, 여러분도 고등학교에서 그럴 거에요. 때로 힘들겠지만요.)
케일라는 더이상 '자신감 동영상'을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그렇게 덧붙인다. 진짜 자신, 현실 세계와 만나기로 한 케일라처럼
번햄도 이제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Inside'에서 장발에 덥수룩한 수염으로 내내 1인극을 펼쳤던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멀끔하게 단장한 외모로 작업실 문밖으로 나간다. 조명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어색하고, 약간은 두려운 표정으로 그는
서있다. 번햄이 창작자로서 가지는 매우 중요한 재능은 자신의 상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독창적 관점, 그리고 영상물을 다루는
본능적 감각이다. 케일라와 번햄의 힘들었던 8학년은 지나갔다. 그가 'Eighth Grade'에서 보여준 청소년 세대와 사회
탐구, 'Bo Burnham: Inside'의 치열한 자기 성찰과 매체 통찰력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 친구야말로 진짜
영화를 해야한다, 고 나는 외치고 싶어졌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ighth Grade(2018)'에서 케일라 역으로 열연을 펼친 Elsie Fisher. 이 배우의 직관적인 연기는 감탄을 자아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Bo Burnham: Inside(2021)'의 한 장면. 이렇게 망가졌던 번햄은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원래 이런 외모의 청년이었다.
****Social Media의 어두운 면을 조망한 다큐 The Social Dilemma(202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social-dilemma2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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