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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의 품격, CODA(2021)

 

  '출발! 비디오 여행'의 인기 코너인 '영화 대 영화'. 김경식의 맛깔나는 해설은 언제 들어도 즐겁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전창걸의 구수한 입담이 더 기억에 남는다. 영화 'CODA'를 보면서 그 코너에 딱 맞는 영화네, 싶었다. 이 영화는 2014년에 만들어진 '미라클 벨리에(La Famille Bélier)'의 헐리우드 리메이크작이다. 과연 'CODA'는 원작 영화와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걸까? 이 영화는 원작을 뛰어넘는 좋은 작품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 기대를 갖고 영화를 보려는 이들은 그냥 마음을 내려놓는 편이 낫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참으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범작이기 때문이다.

  작은 어촌 마을, 루비에게는 청각장애인 부모와 오빠가 있다. 아빠와 오빠를 따라 뱃일도 마다하지 않는 이 씩씩한 아가씨는 가족의 대변인 노릇도 하고 있다. 루비의 부모가 병원에 가는 일, 어촌의 조합 일을 비롯해 집안의 대소사는 말을 할 줄 아는 루비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일들이 버겁기는 해도 루비는 묵묵히 해낼 뿐이다. 학교의 동급생들은 루비가 CODA(Child of deaf adult, 청각 장애인을 부모로 둔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놀리며 무시한다. 그런 상황에서 별 생각없이 들어가게 된 합창반. 지도 교사 베르나르도는 루비의 재능을 발견하고 음대 진학을 권유한다. 하지만 집안의 생계가 걸린 뱃일은 루비의 도움이 없으면 해나가기 어렵다. 자신의 진로와 가족 사이에서 루비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루비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영화는 원작의 설정을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미라클 벨리에'에서 주인공 폴라의 가족이 사는 농촌 마을은 어촌으로, 남동생은 오빠로, 파리의 음악 대학은 버클리 음대로 바뀐다. 내가 놀란 것은 등장인물들의 분장과 스타일링까지도 판박이처럼 베꼈다는 사실이다. '미라클 벨리에'에서 긴 수염을 기른 폴라의 아빠, 금발 머리를 늘어뜨린 엄마의 모습은 배우만 바뀌었을 뿐 '코다'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된다. 정말이지 감독 Sian Heder(본인이 시나리오도 썼다)는 배알도 없네, 하고 혀를 찼다. 이 영화가 우리나라 관객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드는 부분은 따로 있다. 루비는 합창반의 마일스와 집에서 듀엣곡을 연습하는데, 부모의 침실에서 나는 소리에 방해를 받는다. 화가 치밀고 당황한 루비는 침실문을 거칠게 열어제낀다. 아무리 그래도 딸이 부모의 동침 장면을 보게 만드는 건 영 곤혹스럽다.

  그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청각장애인인 루비의 부모와 오빠가 루비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으로 보이는 데에 있다. 가족은 작은 어선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겨우 먹고 살아가는데, 루비가 도와주지 않으면 그마저도 어렵게 된다. 이는 오리지널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미라클 벨리에'에서 벨리에 가족은 나름대로 먹고 살만한 부농이며, 폴라의 아버지는 시장 선거에 출마까지 한다. 'CODA'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좀 더 현실에 천착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도입부에서 루비가 배를 타고 가족과 조업을 함께 하는 모습은 매우 사실적이다. 실제로 주인공 에밀리아 존스는 수화는 물론 연기를 위해 뱃일을 익혔다. 영화 속 루비의 책임은 꽤 무겁다. 가족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짐짝'이 된다.

  '미라클 벨리에'의 폴라가 고민하는 것은 끈끈한 애정으로 묶인 가족과의 이별이지,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다. 루비는 자신의 꿈을 이루려면 가족과 집안의 생계를 내팽개쳐야 한다. 루비에게 그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비가 실기곡으로 선택한 'Both Sides, Now'는 한 소녀의 성장과 독립이라는 주제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노래에는 이제껏 잘 보이지 않았던 인생의 양면성을 바라보는 이의 심정이 담겨있다. 그처럼 루비도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차분하게 보고 싶어한다. 'Je vole(나는 날아올라요)'을 부르는 원작 영화의 폴라와는 달리 루비는 가족과 자신의 미래라는 양쪽(Both Sides)을 두고 고민한다.

  나는 아카데미가 이 영화에 작품상을 안겨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아카데미 시상식은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다. 다양성을 수용하라는 요구에 뜨뜻미지근하게 움직였던 아카데미가 올해는 정치적 판단을 과도하게 했다는 인상을 준다. 작품상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CODA'에게 덥썩 상을 안긴 것을 보면 그렇다. 청각장애인 배우들의 열연, 제작 과정에서 여러 명의 통역사를 두고 비장애인 스태프와의 협업을 이루어낸 점은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예술적 평가는 '정치적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엄밀한 공정성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올해 아카데미에서 'CODA'가 3관왕(각색, 남우조연, 작품)을 차지한 일은 상의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다.

  어설픈 짝퉁 같은 영화. 'CODA'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가? 그럼에도 이 영화가 그 어떤 품격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루비는 대학에 합격해서 보스턴을 향해 떠난다. 남은 가족은 루비의 새출발을 격려한다. 이 가족이 루비 없이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이 결말 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제목 'CODA'에는 악장, 악곡의 끝부분을 일컫는 뜻도 있다. 이제 막 루비와 가족의 작은 이야기 악장이 끝났을 뿐이다. 산다는 건 그렇게 불확실하고 모호한 가운데에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아이의 인공와우 수술을 두고 벌어진 청각 장애인 가정의 갈등, 다큐 Sound and Fury(200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sound-and-fury2000.html

***캐나다 시골 마을 두 친구의 성장과 독립, 다큐 Passage(202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passage2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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