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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즈윅의 진정성 있는 남북 전쟁 탐구, 영광의 깃발(Glory, 1989)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The Emancipation Proclamation)을 공포한다. 링컨의 선언문은 선포 당시 실질적 효력을 갖지는 못했다. 1865년에 수정 헌법 13조가 비준되고 나서야 흑인 노예들은 진정한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그 선언문은 남부 연맹에 대한 일종의 심리전술적 측면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 이 선언문이 절실히 필요한 쪽은 링컨과 북부 연합이었다. 북부의 초기 전황은 불리했다. 가용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뽑아내야만 했다. 흑인 군대에 대한 아이디어가 그렇게 나왔다. 1월의 선언문 발표에 이어 3월에 흑인 병사로 구성된 연대가 조직되었다. 에드워즈 즈윅 감독의 1989년작 'Glory'는 매사추세츠 54 지원병 연대(54th Massachusetts Infantry Regiment)의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소심하고, 무언가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은 젊은 장교를 보게 된다. 로버트 쇼(매튜 브로데릭 분)는 전투에서 가벼운 부상을 입고 병가를 받는다. 그런 그에게 매사추세츠 54 연대를 지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미군 역사상 흑인 병사들로만 이루어진 최초의 부대였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지만, 등장하는 흑인 병사 캐릭터들과 그 이야기는 거의 허구에 가깝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류의 전쟁 영화를 만나면 무언가 좀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영화가 실제와는 또 얼마나 다르게 조미료를 치고 가공했는지, 그걸 다 찾아보고 나면 허망해질 때가 많다. '영광의 깃발'도 그런 면에서 결코 자유롭지는 않다.

  오합지졸과 같은 초짜 흑인 병사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점차 진짜 군인이 되어간다. 다양한 출신 배경을 지닌 병사들의 이야기가 거기에 곁들여진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이러하다. 쇼의 어린 시절 친구로 기꺼이 부대원이 되는 토마스, 노예 출신으로 거칠고 반항적인 트립(덴젤 워싱턴 분), 부대원 가운데 연장자로 온화한 성품을 지닌 롤린스 상사(모건 프리먼 분), 쇼의 친구로 함께 부대를 이끄는 부하 장교 포브스가 있다. 군복과 군화 같은 보급품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움에 시달리는 연대의 모습, 흑인들을 향해 내뱉는 백인 병사들의 인종차별적인 언사, 무차별적인 방화와 약탈을 지시하는 폭압적 지휘관... 영화는 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조리와 모순을 조각조각 이어붙인다. 거기에 극적인 장면도 있다.

  트립은 탈영을 시도했다가 형벌로 공개 채찍질을 받게 된다. 트립의 벗겨진 등에는 그의 노예 시절을 암시하는 험한 흉터 자국이 보인다. 영화는 트립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통해 흑인 노예들의 비참한 처지를 부각시킨다. 그런데 당시 군대에서의 채찍질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흑인 병사들이 정해진 급여 13달러(백인 병사에게만 해당)가 아닌 10달러의 차별적 급여에 반발하며 파업하는 사건은? 영화는 쇼가 부대원들의 파업에 동참해 자신의 급여 통지서를 찢어버리는 감동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실제로 로버트 쇼가 그걸 찢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부대원들의 급여 파업을 적극적으로 독려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부모는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로 그 자신도 인본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화는 허구와 사실을 섞어 괜찮은 그림으로 직조해 나간다. 에드워드 즈윅은 드라마적 요소에 더해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을 효율적으로 배치한다. 이 영화가 갖는 미덕은 이렇다. 역사적 사실을 다룬 영화로서 적당한 선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가공의 인물들을 통해 관객을 미시사적 진실에 접근하도록 만든다.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롤린스 상사는 행군 도중에 마을의 흑인 아이들을 만난다. 그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인사한다. 그 장면은 그가 속한 흑인 연대의 존재 이유를 보여준다.

  매사추세츠 54연대의 그 누구도 죽음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남부 연맹은 흑인 병사는 물론이고 백인 지휘관까지 처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엄포를 놓았다. 실제로 남군에 포로로 잡힌 흑인 병사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흑인 병사들은 입대할 때부터 목숨을 내놓고 전장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원 입대해서 싸운 이유는 어떤 면에서 그들 자신 보다는 다음 세대에게 있었다. 자신들은 비록 죽을지라도 어린 세대들은 노예가 아닌 미합중국의 당당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롤린스가 어린 꼬마들에게 건네는 인사에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마침내 영화는 부대원들이 비극적으로 전사하는 Fort Wagner 전투에 이른다. 난공불락의, 패배가 예견된 이 무모한 전투에서 쇼를 비롯해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스러진다. 영화는 포연이 남아있는 새벽의 풍경 속에 끝난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이후의 일은 이러하다. 관례대로라면 장교인 로버트 쇼의 시신은 북군에게 인도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남군은 그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쇼는 부대원들과 함께 묻혔다. 장렬하게 전사한 매사추세츠 54연대의 지휘관과 부대원들의 이야기는 당시 북부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로버트 쇼와 흑인 연대의 존재는 남북 전쟁에서 북부인들이 왜 싸우는가를 새롭게 각인시켰다. 

  감독 에드워드 즈윅에게 이 영화는 2번째 작품이었다. 그는 드라마와 액션을 적절하게 조합하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다. 1994년에 내놓은 '가을의 전설'에서 즈윅은 'Glory'의 음악을 담당했던 제임스 호너와 또 한 번 같이 작업하면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 냈다. 흥행 면에서 높은 성적을 낸 '가을의 전설'과는 달리 'Glory'는 제작비를 겨우 상회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실제 역사적 사실과 몇몇 부분이 다르기는 하지만, '영광의 깃발'은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선물한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리고 경험하지 않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좀 더 깊이있게 성찰하고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일. 영화 'Glory'는 비참한 노예의 신분에 있던 흑인들이 인간, 그리고 시민의 권리를 얻기 위해 치루어야 했던 희생을 진정성 있게 그려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남북 전쟁을 다룬 이안 감독의 영화 'Ride with the Devil(199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ride-with-devil1999.html
 

***역사학자 Kevin M. Levin은 Smithsonian Magazine에 영화 'Glory'가 실제 역사와 어떤 부분이 다른지 자세히 설명하는 글을 썼다.
https://www.smithsonianmag.com/history/why-glory-still-resonates-more-three-decades-later-180975794/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매사추세츠 54연대를 이끌었던 Robert Gould Shaw. 그는 25살의 나이에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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