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전쟁(The Civil War, 1861-1865)이 일어날 당시 남부의 인구는 9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흑인
노예 인구가 4백만 명이었다. 이는 면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남부의 경제 구조에서 노예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링컨은 노예 제도를 철폐하려고 했다. 남부인들 입장에서 그것은 재산인 노예를 잃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 사회, 정체성 전부가 무너져 내리는 일이었다. 남부가 연방을 탈퇴하고 전쟁에 돌입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안 감독의 1999년작 'Ride with the Devil'은 남부인의 입장에서 전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는 비정규 군사 조직인 'bushwhackers'는 노예제 철폐주의자들에 대한 잔혹한 공격을 감행한 일로 악명이 높았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민병대의 역할을 떠맡으며 북군을 공격했다. 'Ride with the Devil'에서 제이크(토비 맥과이어
분)는 친구 잭을 따라 엉겁결에 'bushwhackers'가 된다. 곧 그들의 무리에 백인 주인과 함께 다니는 흑인 다니엘도
합류한다. 그들에게 북군은 남부인들을 죽이고 남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대적 악이다. 그 북군과 대적하기 위해 부대원들은 점점 더
잔혹해진다. 그렇게 전투가 거듭되면서 온화했던 제이크의 심성도 거칠게 망가져 간다.
집과 가족, 공동체를 지킨다는 대의명분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희미해진다. 오직 무차별적인 살육과 방화만이 반복된다. 영화는 제복
입은 정규 군대의 전투 바깥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전장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제이크는
회의감을 느낀다. 이제 그를 싸움에 나서게 만드는 동력은 동료애에서 나온다. 잭의 죽음, bushwhackers 내부의 불화와
분열을 보면서 제이크는 남부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자각한다.
이안 감독의 이 영화는 아마도 남부인들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 무겁고 어두운 남북 전쟁의 서사에는 어떤
극적인 반전이나 감동이 배제되어 있다. 이안은 이야기의 무미건조한 톤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어찌 보면 적당한 감동을 위한 영화적
타협을 거부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잭과 젊은 과부 수의 러브 스토리가 짧게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이야기의
구색맞추기용 조각 같은 느낌을 준다. 그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처참한 흥행 실패를 기록했다. 솔직히 러닝타임 2시간 28분(감독판
기준)이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나 또한 보는 내내 심드렁했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나가고 있었다. 제이크는 잭의 아이를 낳은 수와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 그는 평범한 한 가장의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유일하게 남은 동료이자 친구, 흑인 다니엘도 자신의 길을 떠난다. 마침내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로 하고 인사를
나눌 때, 그들은 이제까지 불렀던 별명 대신 서로의 온전한 이름을 불러준다.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나는 무언가 가슴에
묵직한 감정이 올라옴을 느꼈다.
제이크는 독일인 이민자의 후손이었고 다니엘은 흑인이었다. 그들은 미국 사회 내부의 비주류, 변방에 자리한 이들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 주변부의 사람들은 어느 쪽에 설 것인지 선택을 강요받았다. 제이크와 다니엘이 남부 게릴라군이 된 것은 정치적
신념이 아닌 인간적 의리 때문이었다. 이안은 껍데기로 남은 정치적 대의명분에 냉소를 보낸다. 'Ride with the
Devil'에서 전쟁은 인간 내면의 감성적 영역에 자리한 우정, 연대 의식, 충성심과 긴밀한 접점을 가진다. 제이크와 다니엘의
작별 장면은 어떤 면에서 남북 전쟁에서 스러진 무수한 개인들에 대한 호명이다. 그것은 북부 연방이나 남부 연맹에 속하지 않는
불행한 주변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이안은 자신의 실패한 영화에서 전쟁의 회색 지대에 자리한 사람들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이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크와 잭은 미주리주 출신이다. 당시 미주리주는 노예제 찬성주였다. 미주리주의 싸움꾼들(Border Ruffian)은 인접한 켄터키주로 넘어가 노예제 폐지론자들 공격하는 일이 많았다. Ken Burns의 다큐 'The West(1996)' 4편에 그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2/pbs-8-ken-burns-west199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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