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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에 대한 Justin Chon의 미시사적 성찰, Gook(2017)

 

  흑백 화면 속에서 가게는 불타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며 흑인 소녀는 팔을 흐느적거리며 춤을 춘다. 영화 'Gook'은 그렇게 기이한 도입부로 시작한다. 그 장면이 지나가고 나서 관객이 만나는 인물은 한국계 미국인 일라이이다. 한적한 길가에서 그는 이제 막 신발 도매상으로부터 물건을 넘겨받으려는 참이다. 그런데 멀리에서 차 소리가 들린다. 뭔가 당황한 일라이는 물건 받는 것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나려고 한다. 지나가는 일라이를 보더니 차에 탄 남자들이 욕설을 퍼붓는다. 일라이는 다소 겁에 질린 표정이지만, 그래도 지지 않고 대거리를 한다. 차에서 내린 히스패닉 남자 둘은 일라이를 흠씬 두들겨 패고는 자리를 뜬다.
 
  1992년 4월 29일, 그날은 그동안 미뤄졌던 로드니 킹 사건의 평결이 내려지는 날이었다.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LA는 폭력과 방화가 난무하는 무법천지의 장소가 되었다. 한국계 미국인 Justin Chon은 바로 그 LA 폭동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배우로도 활동하던 그는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일라이 역을 연기했다. 그의 아버지도 영화 속 김씨 아저씨로 나온다. 이민자인 그의 부친은 실제로 신발 가게를 하기도 했었다. 영화 'Gook'은 여러 면에서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있는 셈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일라이는 아무 이유없이 히스패닉에게 구타당한다. 그의 동생 다니엘 또한 길을 걷다가 흑인들에게 얻어맞고 신고 있던 운동화를 뺏긴다. 이런 장면들은 당시 LA의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인종 차별의 실체를 드러낸다. 일라이가 히스패닉을 마주할 때, 다니엘이 흑인들을 지나칠 때, 그들은 직감적으로 자신들에게 생길 일들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제목 'Gook'은 아시안계 미국인들을 폄하하며 지칭하는 단어이다. 누군가 일라이의 차에 스프레이로 써놓은 그 글씨는 당시 LA에서 한인들이 처한 열악한 인종적 지위를 보여준다. 다른 유색 인종에게 언제든, 별 이유없이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하는 처지. Justin Chon은 폭동 그 자체보다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적대적 분위기를 드러내는 데에 주력한다.  

  일라이와 다니엘은 외진 변두리에 자리한 신발 가게를 꾸려가느라 분투한다. 가게에는 흑인 소녀 카밀라가 들러서 일을 돕는다. 이 11살 카밀라한테만은 팍팍한 표정의 일라이도, 툴툴거리고 제멋대로인 다니엘도 다정하게 대한다. 심지어 그 둘은 길 건너편 주류점 주인 김씨가 카밀라가 물건을 훔쳐갔다고 하자 욕설을 퍼붓으며 살벌하게 몰아세운다. 카밀라는 가게를 제집처럼 드나들지만, 카밀라의 오빠 키스는 이 가게 형제들 이야기만 나오면 눈썹을 치켜뜬다. 마침내 시내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키스는 친구들과 함께 일라이의 가게를 약탈할 계획을 세운다.

  왜 흑인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찰들의 무죄 평결에 대한 분노가 한인들에게 쏟아졌는가? 폭동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흑인 커뮤니티 내부의 축적된 분노와 불만의 출구가 한인들을 향하도록 구조화되었다는 점이다. LA 경찰들은 일련의 폭력과 방화를 방조했으며, TV로 생중계된 화면 속 공권력 부재 현장은 약탈자들에게 일종의 '신호(signal)'가 되었다. 시의 경찰 병력은 백인 부유층 거주지로 가는 진출입로는 철저히 막았지만, 약탈 대상이 된 한인 상점가 밀집 지역에서의 출동 요청은 묵살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인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자경단을 꾸릴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속에서 김씨 아저씨는 자경단의 일원으로 순찰을 돌다가, 얻어맞고 길을 헤매는 다니엘을 태워준다. 그의 차 안 무전기에서는 교신하는 한인들의 한국말이 흘러나온다. 김씨는 한국어로, 다니엘은 영어로 계속 말하는 대화 속에서 관객은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이들 사이에 어떤 유대감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김씨는 형제의 부친과 친구 사이였다. 이민 1세대와 2세대가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장면은 서글픈 울림을 준다.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일라이도 한국말을 하는 김씨에게 영어로만 말한다. 이러한 세대 간 언어 장벽은 이민자 2세대들의 정체성이 '한국인'이 아닌, 'Asian American'에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다니엘이 힙합 뮤지션이 되기를 꿈꾸며 노력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영화 'Gook'에서 1992년 LA 폭동 사건은 거친 배경적 윤곽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감독 Justin Chon의 영리한 책략이기도 하다. 사건의 실체에 대해 섣부르게 접근하는 대신, 그는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폭동에 대한 미시사적 사유를 시각화한다. 카밀라가 일라이와 다니엘 형제의 이복 여동생이라는 점은 그런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카밀라의 존재는 흑인과 한인 이민자들이 서로 연결된 가족 공동체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그 두 집단이 갈등과 대립이 아닌 공존을 모색해야하는 동반자여야 한다는 바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카밀라가 비운의 사고로 죽자 일라이는 스스로 자신의 가게에 불을 지른다. 이제 영화의 도입부 장면이 갖는 의미가 명확해진다. 이미 숨을 거둔 카밀라가 화염에 휩싸인 일라이의 가게 앞에서 추는 춤은 '죽음의 무도'로 형상화된 LA 폭동이다.

  LA 폭동에 대한 좀 더 실제적이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관객들에게 영화 'Gook'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PBS의 5부작 다큐멘터리 Asian Americans(2020)의 'Episode 5 - Breaking Through(1980s-2010s)'는 그 사건에 대한 개관적 접근을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또는 그것을 다룬 영화를 통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거나 쉽지 않다. 거기에는 왜곡과 오류가 포함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오히려 그런 기대를 갖기 보다는, 그런 영화들을 마중물로 삼아 책을 비롯한 다른 매체들로 탐구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낫다. 'Gook'은 나에게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LA에서 일어난 일들을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감독 Justin Chon의 이 영화는 작지만 의미있는 표지판처럼 여겨진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한국계 미국인 감독 앤드류 안(Andrew Ahn)의 영화들, Spa Night(2016)와 Driveways(201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andrew-ahn-spa-night2016-driveways2019.html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Minari, 2020)'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minari-20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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