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길을 잃은 사람들, The Bigamist(1953)

  

  여배우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이혼은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이루어졌다. 영화 제작자였던 여배우의 남편은 곧 다른 여배우와 결혼했다. 연기뿐만 아니라 연출에도 재능이 있었던 여배우는 자신의 영화를 찍기로 한다. 제작과 시나리오는 전남편이, 주연은 전남편과 재혼한 여배우가 맡았다. 'The Bigamist(1953)'은 정말 특이한 영화이다. 뭔가 한자리에 있어도 껄끄러울 것 같은 세 사람이 같이 영화를 찍었기 때문이다. 여배우는 Ida Lupino, 전남편은 Collier Young, 전남편과 결혼한 이는 Joan Fontaine이다. 영화는 '중혼자(重婚者)'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아내를 둔 남자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줄거리이다. Ida Lupino는 연출도 하고 연기도 했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여자 필리스 역을 맡았다.

  냉장고 판매 사업을 하는 해리와 아내 이브는 입양을 결정한다. 이브는 불임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다. 입양 기관의 조사 담당관 조단은 해리에게서 미심쩍은 느낌을 받는다. 해리의 주변을 탐문하던 조단은 LA로 출장을 간 해리가 아기와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단이 중혼죄로 경찰에 신고하려던 순간, 해리가 이를 말린다. 해리가 조단에게 털어놓는 과거는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이 남자는 어쩌다 딴살림을 차리고 아이까지 두게 된 것일까...

  이 영화에서 해리 역을 맡은 배우 에드먼드 오브라이언은 미남 배우의 외모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배우 생활 내내 체중 조절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뭐랄까, 후덕한 인상의 동네 아저씨 같은 외모이다. 그런 그가 연기하는 '해리'라는 인물은 아내를 사랑하며, 결혼 생활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쓴다. 아내 이브는 해리의 일을 돕게 된 이후로 오히려 사업에 매진하고, 그런 아내에게서 해리는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에 그는 우연히 LA에서 알게된 필리스와 사랑에 빠진다. 중요한 것은 해리가 필리스와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여느 필름 느와르 영화라면 불륜에 빠진 남자 주인공이 여자와 공모해서 아내를 죽이려는 이야기로 나아갈 법도 하다. Douglas Sirk'Sleep, My Love(1948)'가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가스등(Gaslight, 1944)'의 변형된 서크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부유한 상속녀 아내를 죽이려는 남자가 나온다. 매혹적인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난 남자는 아내에게 공포의 기억과 불안을 주입시켜서 자살에 이르게 하려고 한다. 이 사악한 남편의 살해 시도는 너무나도 필사적이다. 그와는 달리 'The Bigamist'의 해리는 책임감 있는 선량한 남자이다. 놀랍게도 그는 이브와 필리스를 모두 사랑한다. 이 남자는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혼한 남자가 동시에 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정말 비난받아 마땅한 일인가? 다소 선정적으로 흐를 수 있는 '불륜'이란 소재를 아이다 루피노는 아주 부드럽고 세련된 방식으로 다룬다. 당시 미국 영화의 자체 검열 기준인 'Hays Code'에 따르면 결혼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이야기는 암묵적인 금지에 해당되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행동에 나름의 근거와 이유를 가지고 있다. 불임인 이브는 입양으로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해리는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필리스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필리스는 아이를 가졌지만 유부남인 해리에게 그 어떤 책임이나 부담감을 지우지 않는다. 결국 해리는 'bigamist', 중혼자의 처지가 된다.

  당시 미국에서 '중혼죄'는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회 문제였다. 아이다 루피노가 그러한 이야기를 과감하게 자신의 영화로 만들기로 한 데에는 그런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루피노는 중혼자들을 단순히 매도하거나 악마화하는 대신에, 내밀한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킨다. 영화 속의 '해리'가 보여주듯, 착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중혼의 그물에 갇힐 수도 있다. 관객은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다는 기이한 딜레마에 빠진다.

  루피노의 전남편 콜리어 영이 쓴 시나리오에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 부부의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마도 그는 영화 속 바람난 남편의 아내인 이브의 처지와도 같았겠지만,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이다 루피노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을 무렵에 그가 이미 조안 폰테인과 연애 중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는 이혼한 다음해에 폰테인과 재혼했다. 영화는 TV 프로그램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마지막처럼 법정 장면에서 끝난다. 아내와 필리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해리는 자신을 포함해서 모두에게 슬픔과 고통, 수치심을 안겨주는 결과에 이른다. 'The Bigamist'는 불륜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죄악시하지도 않는다. 아이다 루피노의 관심사는 윤리적인 판단이나 비난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그것이 초래하는 현실의 파장에 있다.

  나는 비참하고 길을 잃은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찍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죠.
(She wanted to do films “with poor, bewildered people,” she once said, according to the New York Times. “Because that’s what we are.” - 인용문 출처 vanityfair.com)


  'bewildered'는 보통 '당혹스러운'이란 의미로 쓰인다. 또 다른 의미로 이 단어는 '심리적, 신체적으로 무너지고 상처입은'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아이다 루피노는 동시대 영화가 외면했던 주변부 사람들을 자신의 영화에 내세웠다. 대표작 'Outrage(1950)'는 강간 피해자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Never Fear(1950)'는 소아마비를 이겨낸 여성 댄서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영화는 배우 생활 중에 소아마비에 걸려 투병해야 했던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다. 'Hard, Fast and Beautiful(1951)'에서는 착취적인 엄마에 시달리는 테니스 스타를, 'Not Wanted(1949)'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인 미혼모 문제를 다루었다. 루피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상처입었으며 어디로 갈지 몰라 길 위에 서있다. 영화 'The Bigamist'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불완전한 내면을 성찰한다.  



 
*사진 출처: cultfilmalley.com.au       아이다 루피노와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영화 'The Bigamist(1953)' 촬영장의 세 사람. 좌측부터 순서대로 조안 폰테인, 콜리어 영, 아이다 루피노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주연의 영화 'D.O.A.(195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somewhere-in-night1946-doa1950-no-way.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