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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 삶, 그 처절한 연대기: Jon Alpert의 다큐 Life Of Crime 1984-2020(2021)

 

  "내 미래를 생각한다면 엄마가 여기 있는 편이 훨씬 낫겠죠."

  델리리스의 9살 된 어린 딸 키키는 감옥에 있는 엄마를 면회하고 나오면서 그렇게 말한다. 도대체 소녀의 엄마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984년, 다큐멘터리 제작자 Jon Alpert는 New Jersey의 Newark 거리에서 세 명의 범죄자들과 알게 된다. 롭과 프레디는 친구 사이였고, 델리리스는 롭의 여자 친구였다. 앨퍼트의 카메라는 1년 동안 절도와 마약 밀매에 가담한 세 사람의 일상을 기록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다큐가 'One Year in A Life of Crime(1989)'이었다. 다큐의 후일담도 나왔다. 'Life of Crime 2(1998)'가 그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어져서 이제 완결판 다큐인 'Life Of Crime 1984-2020(2021)'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무려 36년 동안의 시간이 담겨 있다.

  다큐가 시작되면 관객은 범죄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롭과 프레디를 만나게 된다.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일은 그들에게 생계이며 일상이다. 훔친 물건들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고, 마약 밀매도 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약 중독자의 길에 들어선다. 롭의 여자 친구 델리리스 또한 마약 중독의 늪에 빠져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사로 일하기도 했던 델리리스는 중독자가 되면서 삶이 추락했다. 세 아이의 엄마인 델리리스는 매춘과 마약 판매로 중독자의 삶을 이어간다.

  존 앨퍼트가 보여주는 범죄의 초상은 너무나도 적나라해서 마치 착취 다큐멘터리 같다. 그의 카메라는 롭과 프레디의 절도 행각을 비롯해 마약을 주사하는 장면도 그대로 다 담는다. 앨퍼트는 처음에는 냉철한 관찰자로서 그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 명의 범죄자들과 앨퍼트 사이에는 인간적인 유대가 쌓였다. 롭과 프레디, 델리리스는 자신들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다. 앨퍼트는 진심 어린 조언도 한다. 제작자와 촬영 대상자 사이에 그런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 다큐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전에 촬영된 낡고 거친 화면 속의 젊은 세 사람은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다. 롭은 사회적 낙인을 이겨내고 일자리를 얻어 일반인의 삶에 안착하려고 애쓴다. 프레디는 1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왔다. HIV 양성 판정을 받고 에이즈 환자가 된 그에게 감옥 밖의 삶은 버겁기만 하다. 델리리스도 착실히 살아가려고 하지만, 중독의 수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어린 딸 키키는 엄마의 삶을 보면서,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다큐는 체포와 수감, 실패한 재활과 범죄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어떤 면에서 롭과 프레디, 델리리스의 처절한 삶의 여정은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맞닿아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의 마약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레이건은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단속과 강력한 처벌로 대응했다. 거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형량과 인종 차별적인 편향성이라는 문제점이 내재하고 있었다. 이 다큐에 나오는 세 명의 인물들 가운데 롭은 백인, 프레디와 델리리스는 히스패닉이다. 그들이 수감된 감옥을 비춰주는 장면에서 수형자들 대부분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이다. 미국 사회에서 범죄와 인종 문제는 뿌리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마약 범죄자들을 단지 감옥에 넣는 것만으로 마약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큐는 세 친구의 험난한, 그리고 결국에는 실패로 귀결된 재활의 여정을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따라간다. 롭과 프레디는 결국 마약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오직 델리리스만이 신앙과 의지력으로 13년 동안 마약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2020년, COVID-19으로 사회 복지 서비스가 축소된 상황에서 델리리스는 단 한 번의 마약 복용으로 죽음에 이른다. 델리리스의 삶은 '중독'이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두고 싸워야 하는 힘든 투쟁임을 보여준다.

  다큐의 마지막, 앨퍼트는 촬영을 시작한 1984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의 약물 중독 사망자수가 500만 명이라고 알려준다. 'Life Of Crime 1984-2020'은 어느 범죄의 응축된 연대기인 동시에, 다큐 제작자의 36년에 걸친 집념의 산물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마약 문제, 중독자들의 재활 지원 정책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도 포개어져 있다. 영국의 다큐 제작자 마이클 앱티드(Michael Apted)'Up series'는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계층의 어린 아이들이 중년에 이르는 삶을 담아냈다. 계층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앱티드의 다큐와는 또 다른 지점에서 존 앨퍼트는 범죄와 삶, 미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초상을 그려낸다.  



*사진 출처: daily-journal.com


**마이애미 마약왕들의 범죄를 다룬 다큐, '코카인 카우보이: 마이애미의 제왕들(Cocaine Cowboys: The Kings of Miami)'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cocaine-cowboys-kings-of-miami-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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