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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o Risi 감독의 두 영화: Il Vedovo(The Widower, 1959), Una vita difficile(A Difficult Life, 1961)

 

1. 코미디 속에 감추어진 계급과 자본주의, 홀아비(Il Vedovo, The Widower, 1959)

  "내 꿈은 말입니다, 아내가 어서 죽어 내가 홀아비가 되는 겁니다."

  남자는 꿈꾸는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회계사에게 그렇게 말한다. 로마의 엘리베이터 회사 사장 나르디(알베트로 소르디 분). 그가 사업 때문에 여기저기서 빌린 돈이 산더미처럼 늘어나지만, 회사의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나르디는 부유한 아내 엘비라의 도움을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엘비라는 남편을 도울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남편의 무능을 비웃으며 면박을 주기 일쑤이다. 이쯤되면 이 남자가 왜 '홀아비(widower)'가 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채권자들, 공장 노동자들, 내연녀. 그들은 모두 나르디에게서 돈을 원한다. 머리가 터질 지경의 나르디에게 곧 놀라운 소식이 들린다. 친정인 밀라노에 가기 위해 아내가 탄 기차가 탈선으로 호수에 추락했다는 것. 아내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나르디는 부자 홀아비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데...

  나르디의 아내 엘비라는 밀라노 출신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경제 중심지로서 밀라노 사람들이 갖는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곳 출신으로 부자인 엘비라는 투자 감각도 뛰어나서 손대는 것마다 돈이 되어 돌아온다. 그런 엘비라가 사업 말아먹는 나르디와 사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가진 돈 때문에 남편이 결코 떠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엘비라는 로마 출신, 거기에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에게 지배적 우위를 확인하며 사는 것이 삶의 낙이다.

  나르디라고 생각이 없지는 않다. 아내의 구박을 받고 살기는 하지만, 나르디는 자신의 사업이 반드시 잘 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인생은 한방, 나르디의 이 과대망상적 기대는 끊임없이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경제적 성공에 대한 나르디의 열렬한 바람은 한편으로는 아내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엘비라는 부자이며 그 지인들도 모두 성공한 사업가들이다. 그들은 돈이 돈을 버는 전형적인 자본가 계급에 속해 있다. 어떻게든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서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고 싶지만 나르디의 현실은 암담하다. 그런 그에게 죽은 아내의 유산은 유일한 희망이 된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아내는 살아서 돌아온다. 다시 예전처럼 지겨운 빚쟁이들과 아내의 모욕적인 독설에 시달리면서 살 수는 없다. 남자는 이제 우연을 기다리지 않고 필연적인 죽음을 계획한다. 엘리베이터 사고로 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내버리려는 것. 그러기 위해 자신의 삼촌, 회계 담당 비서, 회사의 기술자와 공모한다. 뭔가 계획은 그럴듯한데 그걸 꾸미는 이들의 면면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나르디의 계획이 실패할 거라는 데에 호주머니 속의 동전을 내놓을 것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무능한 사업가 남편의 예기치 않은 일탈을 그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이탈리아 사회의 경제적 모순이 담겨 있다. 이탈리아는 2차 대전의 패전국이었음에도, 미국의 전후 유럽 원조 정책인 마셜 플랜의 수혜를 받아 재빨리 회복 국면에 들어섰다. 전후의 정치적 격변기를 틈타,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지주들은 자본가가 되었다. 영화 속에서 엘비라와 그 주변 지인들이 보여주는 호화로운 삶은 그런 자본가 계급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은유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성공한 사업가로 부자가 되고 싶은 평범한 로마 사람 나르디의 바람은 결국 좌절된다. 나르디에게 닥친 비극은 극복할 수 없는 계층적 간극을 보여준다. 영화 '홀아비(Il Vedovo, 1959)'에서 디노 리시(Dino Risi)는 탁월한 코미디적 감각으로 전후 이탈리아 사회의 자본주의적 욕망을 부각시킨다.


2. 디노 리시가 반추하는 전후 이탈리아 현대사, 힘든 삶(Una vita difficile, A Difficult Life, 1961)

  영화는 파르티잔(partizan)인 남자가 한적한 시골 호숫가 마을에 숨어드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남자의 이름은 실비오.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독일군이 장악한 무솔리니의 괴뢰정부가, 남부는 연합군에 승복한 왕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파시스트 파르티잔들은 독일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실비오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독일군에게 발각되어 죽을 위기에 처한 실비오(알베르토 소르디 분). 마을 여관집 주인 딸 엘레나는 다리미로 독일군을 죽이고 실비오를 구해낸다. 석 달 동안 함께 지내며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실비오가 다시 파르티잔에 합류함으로써 헤어진다. 종전과 함께 신문기자가 된 실비오는 2년 만에 엘레나를 찾아가는데... 

  때로 영화는 우리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탐색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영화 '힘든 삶(A Difficult Life, 1961)'은 이탈리아의 전후 역사에 대한 개관적인 사실을 제공한다. 주인공 실비오가 파르티잔이었다는 점은 이 영화가 그려내는 역사적 풍경이 반파시스트 공산주의자의 전후 생존기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과연 그들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조국으로부터 합당한 대우와 평가를 받았을까? 영화의 제목 '힘든 삶'에 그 답이 들어있다.

  실비오는 가진 것이라고는 글을 쓰는 재능 뿐인 가난한 지식인이다. 영화는 실비오가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굴곡진 삶의 행로를 걷는 것을 충실히 보여준다. 진실을 전한다는 언론인의 자부심은 궁핍한 삶과 충돌한다. 어렵게 엘레나와 가정을 꾸리고 아이까지 두게 되었지만, 가장으로서의 실비오는 낙제점이나 다름없다. 그는 언론사를 소유한 부자 기업인의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한다. 자신의 신념을 꺾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도, 실비오는 좌파주의 신념과 개혁에 대한 이상을 고수한다. 그럴수록 실비오의 삶은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는 사회전복 혐의로 2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석방된 뒤로는 일자리도 얻지 못한다. 

  목구멍이 포도청. 엘레나는 실비오에게 전공인 건축학 대학원에 진학해 안정된 일자리를 얻으라고 간청한다. 대학원 면접 시험장에서 교수들은 실비오의 파르티잔 경력을 폄하한다. 그러자 실비오는 1944년에 누군가는 검은 셔츠(Blackshirts, 파시스트 준군사 조직) 입고 무솔리니를 위해 싸웠다고 일갈한다. 그 파시스트 잔당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기존 정치 세력에 흡수되었다. 실비오는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책을 쓴다. 그가 쓴 '힘든 삶'이라는 제목의 책은 출판사, 그리고 영화사로부터도 거절당한다.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는 것이 거절의 사유였다. 반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 세력은 이탈리아 정치계에서 국외자 취급을 받으며 쇠퇴의 길을 걸어갔다.

  실비오의 불운한 삶은 그렇게 전후 이탈리아의 현대사와 공명한다. 엘레나는 실비오의 곁을 떠난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교주와 같았던 스탈린도 죽었고, 실비오도 이젠 더이상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부자 언론인의 비서가 되어서 그 뒤치다꺼리를 떠맡는다. 사랑하는 아내, 아들과 함께 하는 안온한 삶을 위한 댓가란 그런 것이다. 영화는 실비오가 자본과 권력의 시종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데에서 끝난다. 그러한 결말은 이 파르티잔의 '힘든 삶'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디노 리시 감독의 영화 '홀아비'와 '힘든 삶'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는 이탈리아의 국민배우로 불리는 알베르토 소르디(Alberto Sordi)이다. 이 위대한 배우의 연기에는 그 어떤 걸림도 없다. 흔히 배우를 '천(千)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배우가 바로 소르디이다. 그는 평범한 얼굴에서 삶의 희노애락을 끌어내며, 관객을 인물의 현실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러한 소르디의 연기는 디노 리시 감독의 사회 비판적인 영화와 멋지게 조우한다. 디노 리시 감독이 '힘든 삶'에서 재즈 음악을 적절하게 사용한 것도 인상적이다. 전후 이탈리아 사회의 변화는 흥청거리는 재즈의 음률과 잘 어울린다. 이탈리아 영화사에 관심있는 이라면 두 영화를 놓치지 않기 바란다.   




*사진 출처: themoviedb. org




**루이지 코멘치니 감독의 영화 리뷰
모두들 집으로, Tutti a casa(Everybody Go Home, 1960)
과학적인 카드 도박꾼, Lo Scopone Scientifico(The Scientific Cardplayer, 1972)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1/luigi-comencin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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