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9/11: Inside the President's War Room(2021)

 

그날, 대통령의 시간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그날 저녁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대국민 담화를 준비한다. 중계 방송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대통령은 책상 위를 세차게 내려친다. 파리 한마리를 잽싸게 죽인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얼른 평정심을 되찾는다. 이 장면은 백주 대낮에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테러 사건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기이하게 비춰진다. 이날 TV 화면에 비친 대통령은 확신에 차있으며 미국민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9월 11일 당일 대통령 부시의 행적은 그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Adam Wishart의 다큐 '9/11: Inside the President's War Room(2021)'은 바로 그날,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복기한다. 부시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당시 부통령 체니, 국가 안보 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보좌진들의 생생한 증언, 사진과 영상 자료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건 발생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9/11 테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인터넷으로도 충분히 검색 가능하다. 이 다큐는 이제까지 알려진 9/11의 세부적인 항목에 무언가를 더하는 대신에, 대통령 부시의 관점에서 그날의 일을 재구성한다. 9월 11일 새벽, 대통령은 여느 때처럼 새벽 조깅을 했다. 오전에는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참관하는 행사가 기획되어 있었다. 참관 수업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보좌진은 믿기지 않은 테러 소식을 접한다. 어떻게든 대통령에게 알려야만 했다. 수업중 귀엣말로 보고받은 대통령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마디로 그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대통령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소식을 접한 보좌진들도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한가지였다. 대통령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부시와 참모진들의 행적은 처절한 도피 같았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뉴욕은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는데, 대통령을 비롯해 백악관의 그 누구도 사건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TV 방송사들이 그 모든 상황을 발빠르게 보도하고 사건 현장을 지켰다. 대통령과 보좌진조차 TV 중계 화면을 무엇보다 의지했다. 대통령 전용기의 전파 수신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도 한몫했다. 전용기의 부시와 그 참모들은 백악관과 연락이 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모든 상황을 지휘해야할 대통령은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지 못했다. 부시는 백악관에 가야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보좌진들은 위험하다며 말렸다. 그들이 안전한 장소를 찾는다며 군사 기지를 전전하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TV 방송국의 앵커는 도대체 대통령이 어디에 있는 거냐며 비꼬았다.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전용기 안의 부시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제대로 된 정보는 차단되어 있었고, 보좌진은 대통령의 안전이 담보되는 곳을 찾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것은 백악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들은 백악관 지하 벙커에서 회의를 한다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갑자기 많이 몰린 사람들 때문에 지하 벙커의 공기가 희박해져서 나중에는 모두들 졸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그것은 총체적인 무능과 혼란, 그 자체였다. 압도하는 공포에 휩싸인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은 어떤 결정이 올바른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제한된 정보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소통 과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다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난 부시가 어떻게 정책 결정권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가는가를 흥미롭게 부각시킨다. 그는 백악관에 돌아오고 나서야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체니, 럼스펠드, 라이스, 그가 의지하고 믿는 최측근 참모들이 그에게 투사로서의 기운을 불어넣어주었음이 분명하다. 부시의 주변은 전형적 주전론자인 매파 관료들이 득시글거렸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쟁 선포는 그런 가운데에서 나왔다.

  오직 국무부 장관 콜린 파웰만이 외교적 해결 방법을 강구해야한다고 직언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부시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부시는 부친이 감행했던 이라크전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버지 부시는 전쟁을 통해 강한 미국, 전쟁을 이끄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그 아버지처럼 아들 부시는 이제 새로운 전쟁으로 미국을 이끌어갈 참이었다. 부시는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직감적으로 알았다. 대국민 담화와 테러 현장 방문은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신중하게 계획되었다.

  그러나 부시가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거대한 수렁으로 발을 들여놓는 일이었다. 그 전쟁은 무려 20년이나 이어질 터였다. 미국은 힘겹게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을 뺐고, 그곳의 상황은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기 이전보다 악화되었다. 많은 미군과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죽어나갔다. 오직 거대 군산 복합체 기업들만이 득을 보았을 뿐이다. 다큐의 인터뷰에서 부시는 그 결단의 순간을 자랑스럽게 회고한다. 그는 그것만이 미국민을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강변한다. 

  다큐 '9/11: Inside the President's War Room(2021)'이 9/11에 대한 최고의 다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다큐는 당시 미국의 통수권자였던 부시의 입장과 그 정책 결정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다. 2001년 9월 11일, 그날 대통령 부시의 여정은 국가 비상 사태에서 지도자가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 다큐의 관객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통령 부시의 리더십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리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내게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통치 체제가 가진 투명성이 새롭게 다가왔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의 모든 행적과 결정 과정이 명확한 기록과 증언으로 남았다. 다큐에 담긴 그러한 사실은 미국 민주주의의 저력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킨다. 

 
 

*사진 출처: telegraph.co.uk



**이 다큐는 documentarymania.com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룬 다큐

Father Soldier Son(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ther-soldier-son2020.html

Hell and Back Again(201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hell-and-back-again2011.html

Restrepo(201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1-restrepo2010.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