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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아름다웠던 순간, Compartment No. 6(2021)

 

  고고학을 전공한 핀란드 여학생 로라는 러시아 국경 지대 무르만스크의 고대 암각화(petroglyphs)를 볼 계획이다. 무르만스크행 기차 6번 칸. 그곳에는 험한 얼굴에 빡빡머리를 한 젊은 남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보드카를 연신 들이키는 이 남자는 탁자 위에 안주거리를 지저분하게 늘어놓았다. 무언가 불쾌한 여정이 될 것 같다는 로라의 예감은 처음부터 맞아떨어진다. 로라의 행선지를 물어본 남자는 무르만스크에 매춘이라도 하러가냐며 이죽거린다. 남자의 거칠고 상스러운 언사에 놀란 로라는 식당차와 열차 복도를 헤매며 시간을 보낸다. 다른 객실로 바꾸려고 승무원에게 뇌물을 제의하며 부탁하지만 어림도 없다. 로라는 무르만스크의 암각화를 꼭 보고 싶다. 그러러면 저 6번 칸의 남자를 견뎌야 한다.

  핀란드의 감독 Juho Kuosmanen 'Compartment No. 6(2021)'에서 소련 붕괴 직후의 1990년대로 관객을 안내한다. 로라는 불편한 동행 요하를 인내하기 위해 소형 캠코더에 의지한다. 거기에는 모스크바에서 보낸 짧은 유학 기간 동안의 추억이 담겨있다. 캠코더의 영상을 보며 로라는 연인 이리나를 그리워한다. 원래 이 여행도 이리나와 함께 하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리나는 갑자기 여행을 포기한다. 영화의 도입부, 이리나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이리나는 지인들 앞에서 로라를 짖궃게 놀린다. 로라는 그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방에 혼자 앉아있다. 기차가 쉬는 중간 중간 이리나에게 전화를 하지만 이리나의 목소리는 시큰둥하다. 이리나 때문에 가뜩이나 심란한데, 6번 칸의 남자는 자신을 피하려는 로라에게 집요한 관심을 보인다.

  위험해 보이는 남자와의 동행. 처음엔 공포 영화의 분위기를 풍기던 로라의 여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분위기가 누그러진다. 빡빡머리의 이 남자는 기차가 쉬는 중간 기착지에서 뜻밖의 제안을 한다. 엄마 보다 더 가까운 사이의 아줌마 집에 함께 가보자는 말에 로라도 따라나선다. 낯선 도시에서 마주한 따뜻한 환대. 로라는 요하가 겉보기와는 달리 위험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 둘 사이에 놓였던 무지와 편견의 빙벽은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로라와 요하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일반적인 로맨스의 공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요하는 로라의 연인 이름이 이리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동성애자 외국인 여학생과 하층 계급 광산 노동자 요하가 맺는 이 기묘한 인간 관계는 우정, 또는 사랑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다. 마침내 도착한 무르만스크. 그곳 사람들로부터 겨울에는 암각화가 있는 곳에 갈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은 로라는 상심한다. 요하는 그런 로라를 이끌고 힘겹게 암각화 구경에 나선다. 이 저돌적이고 우직한 남자는 그렇게 로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내비친다. 돌아오는 길에 로라와 요하는 거센 눈보라가 치는 들판에서 신나게 뒹굴며 눈싸움을 한다. 사랑이라기에는 무언가 이상하고, 우정이라기에는 더 특별한 것이 둘 사이에는 존재한다.

  이 험한 세상에서 전적으로 낯선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 '6번 칸'은 우리 내면에 자리한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 두려움 대신에 관대함과 인내심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로라의 무르만스크행 6번 칸에는 그러한 만남의 경이로움이 있다. 마음을 열고 함께 한다는 것, 그 충만한 소통의 희열을 관객은 로라와 요하를 통해 공유한다.

  영화 속 소형 캠코더와 카세트 테이프는 지금의 디지털 시대에는 없는 아날로그 시대의 상징이다.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은 아날로그적 감수성과 1990년대 불안정한 러시아 사회를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로라와 요하의 인간적인 소통은 구시대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다. 이제는 정말 보기 힘든 Kodak의 35mm 필름으로 촬영된 이 아름다운 영화에 나는 아낌없이 별 5개의 만점을 준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Compartment No. 6(2021)는 2021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이란의 Asghar Farhadi 감독의 'A Hero(2021)'는 공동 수상으로 영예를 나누어 가졌다.

영화 A Hero(202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all-winners-all-losers2018-hero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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