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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2부: 하우스(ハウス, House, 1977)

 

2. 전쟁의 기억을 간직한 집

 
 
*이 글에는 영화 '하우스(1977)'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TV의 등장과 보급으로 인한 영화 산업의 침체기는 197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일본의 영화사들은 그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로망 포르노와 야쿠자 영화로 활로를 찾았던 니카츠(Nikkatsu, 日活)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오는 유사한 니카츠 영화들에 관객들은 슬슬 진력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 가족 관객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과 특촬(特撮) 영화가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주력 사업이 되었다. 쇼치쿠(Shochiku, 松竹)는 뜻밖의 노다지를 발견했다.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감독'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 1969–1995)' 연작이 그것이었다.

  불황의 시기에 사람들은 더 안전한 투자를 선호한다. 해외에서 성공한 영화를 베끼는 것도 괜찮은 전략이었다. 1976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록키(Rocky)'는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 수익을 냈다. 이 영화를 보고 도에이(東映) 영화사는 비슷한 권투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영화가 테라야마 슈지 감독 '복서(ボクサー, The Boxer, 1977)'였다. 도호(東宝)도 빠질 수 없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Jaws, 1975)' 같은 것을 만들어 보자! 그 뜻밖의 결과물은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하우스(ハウス, House, 1977)'였다.

  주인공 여고생
오샤레는 다가올 여름 방학을 설레임으로 기다린다. 해외에 나가있는 아빠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아빠는 딸을 실망시킨다. 딸에게 새엄마가 될 여자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상심한 오샤레는 엄마의 고향 가루이자와에 있는 이모에게 편지를 쓴다. 이모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여름 방학을 보내고 싶다는 것. 이모는 기꺼이 승락의 답장을 보낸다. 틈만 나면 공상하는 습관이 있는 판타(Fantasy), 학구적인 가리(Professor), 운동을 좋아하는 쿵푸(Kung Fu), 사람들에게 친절한 스위트(Sweet),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맥(Mac), 피아노를 잘 치는 멜로디(Melody). 이렇게 6명의 소녀들과 오샤레는 숲속에 자리한 이모의 집(House)에 도착한다.

  할리우드의 식인 상어는 '소녀들을 잡아먹는 집'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앞서 사토 하지메 감독의 '공포의 저택(怪談せむし男, House of Terrors, 1965)'에서 집에 내재된 전후 트라우마를 탐색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시점에서 오바야시 노부히코도 '집'을 전쟁의 기억과 결부시킨다. 오샤레는 친구들에게 이모의 과거에 대해 들려준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에 이모의 약혼자는 학도병으로 징집당한다. 그는 꼭 돌아겠다는 말을 남기지만, 결국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사한 약혼자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로 이모는 그 집에서 늙어갔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이러한 이모의 과거를 몽타주 쇼트로 편집해서 보여준다. 깃발을 흔들며 병사들을 환송하는 마을 주민들, 뉴스릴 화면으로 제시되는 공습과 폭격, 무엇보다 이 쇼트들에서 인상적인 것은 원폭 투하 장면이다. 이 쇼트는 매우 짧아서 주의깊게 보아야만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모의 기억 속에서 전쟁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과 함께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이제 그 집은 소녀들을 과거로의 여행으로 이끈다. 그 여행은 필시 피와 죽음으로 점철될 터였다.

  통통하게 살이 찐 맥을 보며 이모는 '참 맛있게 생겼다'며 입맛을 다신다. 이모의 모든 행동은 수상쩍기 이를 데 없다. 처음 만날 때 휠체어에 앉아있던 이모는 맥이 사라진 후로는 멀쩡히 걸어다닌다. 햇빛을 싫어하고 피부가 무척 하얀 이 이모의 정체는 흡혈귀였다. 살인 피아노에 먹혀버린 멜로디, 매트리스의 공격을 받고 죽어버린 스위트. 그렇게 친구들이 죽음의 집에서 희생되는 동안 주인공 오샤레는 점차 이모의 영혼에 빙의된다. 돌아올 수 없는 약혼자를 속절없이 기다리다 죽어버린 이모는 어린 조카의 몸을 통해 환생하려고 한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살인귀가 되어버린 집이 소녀들을 삼키는 그 모든 과정을 B급 영화적 감성으로 벼려낸다. 토막난 신체는 마구 날아다니며, 집안의 모든 사물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공격한다. 조잡하게 보이는 크로마키(chroma key)를 비롯해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특수 효과는 사실 무섭다기 보다는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우스'가 끈질기게 소환해내는 전쟁의 기억, 그 상흔은 영화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세월이 흘러도 세대 간에 전이되는 정신적 유산과도 같다.

  오샤레는 분명히 이모가 이미 죽은 사람이며, 이모의 영혼이 조카인 자신의 몸을 통해 영생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조카는 이모의 간절한 소망을 받아들인다. 이모가 느꼈던 슬픔과 외로움은 이모의 일기장을 읽게 된 판타와 쿵푸, 가리에게도 전달된다. 전쟁을 겪지 않은 이 소녀들은 그 기억이 각인된 집에 의해 잡아 먹힌다. 어떤 의미에서 소녀들은 집과 하나의 몸이 되는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기모노로 성장(盛裝)을 한 오샤레는 자신을 찾아온 새엄마 료코를 맞이한다. 오샤레, 아니 조카의 몸을 통해 새로운 삶을 얻게된 이모의 눈이 번득인다. 사람의 피를 갈구하는 이 흡혈 저택은 이미 삼켜버린 6명의 소녀들과 함께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나설 참이다. '나는 외로웠다.' 이모의 일기장에는 그 말이 적혀 있었다. 전쟁은 이모의 내면에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을 아로새겼다. 오바야시 노부히코는 전쟁 세대의 정신적 외상을 공포 영화라는 장르적 틀에서 성찰한다. 그의 영화 '하우스'에는 감각적이고 키치적인 방식으로 분절된 전후의 트라우마가 감지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 두 사람(ふたり, Chizuko's Younger Sister, 199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chizukos-younger-sister-1991.html

 

***테라야마 슈지(寺山修司) 감독, 복서(ボクサー, The Boxer, 197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boxer-1977.html


****야마다 요지 감독,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 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yamada-yoji-voice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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