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영화와 인생, 그 기묘한 이중주: 시작(Начало, The Beginning, 1970)

 

  "두고 봐요. 난 위대한 여배우가 될 테니까."

  작은 도시에서 공장 여공으로 일하고 있는 파샤(인나 추리코바 분)의 일상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여가 시간에는 마을 광장에서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지켜본다. 파샤는 누군가와 간절히 춤을 추고 싶지만 평범한 외모의 파샤에게 눈길을 주는 남자는 없다. 착하고 자기 주장을 잘 하지 못하는 파샤에게 친구들은 이런저런 부탁을 하기에 바쁘다. 이혼한 친구는 자신이 데이트하러 나갈 동안 아이를 돌봐달라고 한다. 이웃 청년은 여자 친구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파샤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한다. 파샤는 그런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파샤의 유일한 취미 활동이라면 동네 극단에서 연기를 하는 것. 파샤는 Baba Yaga(러시아 민담의 마귀 할멈)역을 맡아 사람들 앞에서 공연한다. 다른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부럽게 쳐다보던 어느 날, 파샤에게 한 남자가 춤 신청을 한다. 파샤는 첫눈에 이 남자 아르카디에게 반한다. 파샤는 아르카디에게 자신이 언젠가 유명한 여배우가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런 파샤를 아르카디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과연 파샤의 꿈은 허황된 것일까?

  글렙 판필로프(Gleb Panfilov) 감독의 영화 '시작(Начало, The Beginning, 1970)'은 독특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다. 오프닝 크레딧이 없는 이 영화는 잔 다르크의 심문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종교 재판관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는 잔 다르크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내보인다. '잔 다르크'는 영화 '시작'에서 영화 속 영화인 셈이다. 짧은 머리를 한 여배우는 촬영이 끝나자 만족한 표정으로 촬영장을 떠난다. 화면 위로 그 여배우의 어린 시절, 소녀 때의 사진이 차례로 겹쳐진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사진 속 주인공 파샤의 현실로 들어간다. 이렇게 영화 '시작'은 시골 여공 파샤와 여배우 파샤의 모습을 교차 편집으로 엮는다.

  잔 다르크의 생애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글렙 판필로프 감독은 당국에 여러 번 기획안을 써냈다. 하지만 당국은 판필로프의 기획안을 번번이 반려시켰다. 아마도 영화 당국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정교의 성인도 아니고, 혁명 영웅도 아닌 프랑스 성녀에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자 판필로프 감독은 계획을 수정했다. 자신이 찍고 싶었던 잔 다르크 영화를 영화 속 영화로 넣고, 바로 그 잔 다르크를 연기하는 여배우의 이야기를 풀어놓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은 시대극와 로맨스, 코미디가 결합한 독창적인 영화가 되었다.

  자, 그럼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촌 아가씨 파샤는 어떻게 여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을까? 영화 '잔 다르크'의 여배우를 찾아다니던 감독은 우연히 시골 극단 공연에서 파샤를 발견한다. 마귀 할멈 바바 야가 역을 흥겹게 연기하는 파샤를 감독은 잔 다르크 역으로 점찍는다. 그야말로 길거리 캐스팅의 행운이었던 셈. 그 일 이후로 파샤의 내면과 일상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파샤는 아르카디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르카디에게 직진한다. 매번 자신에게 골치 아픈 부탁을 떠넘기던 친구와 지인들에게도 단호해진다.

  "난 두려워요."

  잔 다르크는 도망을 치려다 붙잡힌 병사 둘을 처형시키라고 명령한 후, 자신의 참모에게 그렇게 고백한다. 영화 밖의 파샤의 삶도 순탄치가 않다. 유부남 아르카디와 살림을 차린 파샤. 아르카디의 본처는 남편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고, 주변 사람들은 불륜녀라고 모욕을 준다.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찾았건만 이 남자는 가정이 있다. 포기하려니 가슴이 너무나도 아프다. 파샤의 내적 갈등은 수난과 고통을 겪는 잔 다르크의 연기로 표현된다. 주변에는 오직 남자들 뿐인 전장, 적들에게 생포된 후 마주한 냉혹한 종교 재판관들. 파샤가 연기하는 잔 다르크는 그들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영화 '시작'은 시골 아가씨 파샤를 통해 영화와 인생의 기묘한 이중주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는 관객이 궁금해할 법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과연 배우들은 어떻게 자신의 역을 연기해내는 것일까? 배우의 실제 삶과 영화는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하는가? 자신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연기'라는 도구로 풀어내는 파샤의 모습은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된다. 파샤는 아르카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하지만 이 사랑은 고통과 수치심을 수반한다. 잔 다르크가 느끼는 외로움, 두려움과 불안은 파샤가 느끼는 현실의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화형의 순간에 잔 다르크는 불길 속에서 외친다. "나는 너무나도 무섭다."

  마침내 파샤의 '잔 다르크' 영화 촬영이 끝난다. 다음 영화의 배역을 부여받지 못한 파샤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배우는 영화 산업의 현장 노동자에 가깝다. 이 장면은 국가가 영화 산업을 통제하는 구 소련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파샤의 고향 사람들은 귀환한 파샤를 열렬히 환영한다. 하지만 파샤는 그 모든 것이 낯설다. 시골 여공은 이제 막 영화 한 편을 찍었을 뿐이다. 연인 아르카디는 아내와 딸에게 돌아갔다. 동네 극단에서 바바 야가를 연기하는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파샤는 시사회장를 가득 메운 관객들 앞에서 인사한다. 거리 건물의 외벽에는 파샤가 연기한 잔 다르크가 커다란 걸개그림으로 나부낀다. '시작'이라는 제목이 뜨면서 영화는 끝난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촌 아가씨 파샤가 배우로서 내딛는 작은 발걸음, 바로 그 짧은 여정을 기록한다.

  파샤를 연기한 인나 추리코바
(Inna Churikova)의 실제 삶도 '시작'과 닮아있다. 감독 글렙 판필로프는 엔지니어로 일하다 좀 늦은 나이에 영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첫 영화 '불길 속에 길은 없다(В огне брода нет, No Path Through Fire, 1968)'의 여주인공을 찾다가 모스크바 청소년 극단에서 연기하던 추리코바를 발견했다. 그 영화에서 추리코바는 러시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에 눈뜨는 간호사 타냐 역을 맡았다. 순수한 내면을 지닌 타냐를 잘 보여준 추리코바는 판필로프의 다음 작품인 '시작'도 함께 했다. 그리고 여배우와 감독은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시작'은 시골 아가씨 파샤의 새로운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배우 인나 추리코바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사진 출처: ru.kinorium.com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영화 '시작(The Beginning, 1970)'에서 잔 다르크로 분장한 인나 추리코바



영화 '불길 속에 길은 없다(В огне брода нет, No Path Through Fire, 1968)'의 인나 추리코바

 

**글렙 판필로프 감독의 영화 '테마(Тема, The Theme, 1979)'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7/theme-1979.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