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의 붉은 조명 아래 서커스단 소녀와 당나귀가 함께 있다. 소녀는 쓰러진 당나귀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소녀는
당나귀를 어루만지고 숨을 불어넣으며 간절히 당나귀의 이름을 부른다. EO, 이것이 당나귀의 이름이다. 마침내 당나귀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소녀는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퇴장한다. 폴란드의 감독 Jerzy Skolimowski의 'EO(2022)'는 당나귀가 주인공이다. 84세의 감독은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동물을 선택했다. 우리는 이미 당나귀가 주인공이었던 Robert Bresson(1901-1999)의 당나귀 발타자르(Au Hasard Balthazar, 1966)'에 대해서 알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에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이 로베르 브레송에게 바치는 헌사(獻詞)와도 같다.
당나귀 발타자르의 불행은 자신을 아껴주던 마리와 헤어지면서 시작된다. EO도 그 누구보다도 EO를 아껴주는 소녀 카산드라와
이별하면서 시련을 맞이한다. 역설적이게도 EO의 수난은 동물 보호 단체의 시위가 원인이 된다. 시위자들은 서커스단이 동물을
학대하고 있다며 그 동물들을 구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해서 서커스단을 떠난 EO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당나귀의 시점 쇼트(POV, point of view)와 생생한 사운드 효과를 통해 EO의 여정을 극적으로 구성한다.
EO의 순탄치 않은 앞날은 EO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산길을 내려갈 때에 전경(foreground)에 쓰러지는 거대한 나무로
예견된다. 그리고 숲속에서 길을 잃은 EO는 사람의 총에 맞아 죽은 늑대가 흘린 피를 본다. EO의 POV 쇼트를 채우는 붉은색은
무섭고 불길하다.
로베르 브레송이 당나귀 발타자르의 수난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드러낸 것처럼, 영화 'EO'도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다.
EO의 눈을 통해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악하다. 방랑하던 EO는 뜻하지 않게 축구 클럽 팬들의 난동에 휩쓸린다.
단지 상대팀의 휘장을 두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폭도들은 죄없는 당나귀를 죽도록 때린다. 쓰러진 EO의 무의식으로 제시되는
쇼트에서는 인공지능 로봇 개가 등장한다. 이 말못하는 동물이 아픔과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EO는 고통을 알지 못하는 로봇의 삶을 꿈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O는 기계의 몸으로 사는 영생(永生)만을 꿈꾸지 않는다. 이 당나귀가 무엇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자유'이다. EO의 시점
쇼트(POV)는 자유롭게 벌판을 달리는 야생마들의 움직임을 계속 따라간다. 하지만 가축으로, 서커스단의 동물로 인간의 손에 의해
길러진 EO에게 자유는 너무나도 먼 곳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당나귀 EO에게만 한정된 운명은 아니다. EO는 버려진
동물들의 보호소에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여러 동물을 목격한다.
'당나귀 발타자르(1966)'에서도 그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발타자르는 우리에 갇힌 호랑이와 원숭이를 바라보게 된다. 두
영화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체를 존중하지 않는 폭압적 존재로 그려진다. 그것은 인간이 같은 동족에게 행하는 극한의 폭력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EO를 싣고 가던 트레일러 운전기사는 강도에 의해 목이 베어져 죽임을 당한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는 자신이 감명받았던 '당나귀 발타자르'의 주제의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의 내재적 본성에 대한
성찰은 현시대를 뜻하는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로 확장된다. EO의 여정 처음에 목도되었던 쓰러지는 거대한
나무, 붉은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미친듯이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의 날개, 그리고 EO가 건너게 되는 수력 발전소의 다리까지 인간은
자연을 착취하고 상처를 남긴다.
영화 'EO'의 이러한 강한 문명비판적 메시지는 어떤 면에서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노장 감독이 지닌
문제 의식은 동시대의 관객들에게 충분한 호소력을 지닌다. EO의 비극적 최후는 오직 짧고 강렬한 소리만으로 제시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와 맺고 있는 관계가 매우 이기적이고 야만적임을 보여준다. 영화 'EO'는 떠돌이 당나귀의 눈을
통해 인류세의 어둡고 파괴적인 이면을 폭로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이 영화의 당나귀 이름 'EO'는 폴란드어로는 'IO'로 표기된다. 이 폴란드어는 당나귀가
내는 소리를 의성어로 표기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EO로 나오는 당나귀는 모두 6마리이다. 영화의 Ending Credit에 이
당나귀들의 이름이 나온다.
**동물의 삶을 담아낸 다큐
시골 농장 어미 돼지의 삶 'Gunda(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aquarela2018-gunda2020-stray2020.html
축산 농장 암소의 삶 'Cow(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luma-cow20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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