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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자작시: 빨간 반점

  빨간 반점 빨간 반점이 올라왔다 가렵고 아픈 자잘하고 단단한 덩어리 그게 혈관염이라고 하더군 사람들에게 신나게 맥주를 대접했다 아주 커다란 맥주통이 바닥날 정도로 마구마구 퍼줬었지 내가 그 맥주를 마셨던가 그랬던 거 같아 맥주통 바닥에 남은 그 조금 뭘 먹는 꿈은 아플 꿈이야 그래서 빨간 반점이 올라온 거야 꿈해몽 가게를 열면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묘한 자부심이 생긴다 다리에 한 개 손등에 한 개 팔에 두 개 맥주를 들이킨 빨간 반점이 가만히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다 아프고 슬픈 술주정 장맛비가 귀에 쩍쩍 달라붙는 6월의 마지막 밤에

자작시: 돈이 되는 시

  돈이 되는 시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돈이 되는 시를 써야 한다는 거죠 시인이 가난하다는 건 무능력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맞춰살아아죠 팔아먹을 수 있는 시를 써야 해요 자신이 쓰는 시를 상품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화려한 포장지도 쓰고 그래서 고객을 낚아야죠 가만히 두 손 모아 시 쓴 종이 들고 있으면 누가 사간답니까? 시인도 마케팅을 알아야 해요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죠 시 쓰는 강좌도 열어서 수업료 받고, 시 청탁 오면 청탁하는 쪽의 비위도 적당히 맞춰야죠 어느 정도 독자 모이면 월간 구독 서비스로 돈을 받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얼마나 많습니까? 시로 돈을 벌 방법이 말입니다 그저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시 써서 등단하고 시집 내서 독자들이 그걸 사주기만을 기다리는 건 미련한 짓이라 이겁니다 왜 글재주로 돈 버는 걸 부끄러워해요?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어찌되었든 돈 되는 건 팔아서 먹고살아야 하지 않나요? 대가리가 파란 애송이 시인은 당당하게 그렇게 말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돈을 원하면 돈이 오지 않는다 너무나도 진실되게 시를 쓰면 시가 도망가 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처절하게 돈을 생각하지 않으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며 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자작시: 늙은 여자

  늙은 여자 일주일에 세 번 어르신 목욕 차량이 아파트에 온다 즐거운 목욕 시간 만수무강하십시오 알록달록 목욕차의 쓸쓸한 손짓 늙는다는 건 약함과 수치심을 견뎌야 하는 것 휠체어의 할머니는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정오, 차가 떠날 무렵 구정물이 시커멓게 긴 뱀허물의 흔적을 남기며 하수구로 스며든다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겨우 집에 들어선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잘 삭은 마늘종장아찌 한 접시 그리고 커피 사탕 2개 이상한 초여름의 식탁 수도승처럼 바투 자른 머리는 아직도 자라지 않았다 살아있으니, 괜찮아 늙은, 여자  

자작시: 유골함

  유골함 길을 걷다가 버려진 볼펜을 보았다 허연색 볼펜 심이 삐죽이 드러난 고장난 볼펜, 글씨가 써지지 않을까 그래도 허옇게 세어버린 머리를 감추고 싶어서 숏커트를 했다 고장난 인생, 꾸역꾸역 살아지더군 그래도 너가 사는 집은 어떨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지, 젊은 날 얼굴 반반한 내 후배가 거길 갔다고 들었어 왜 내가 아니라 그 애였을까 안경을 쓴 못생긴 남자가 내 앞으로 달리며 지나가 문득, 나는 그리움이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이어달리기임을 깨닫는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 달리는 세월의 경주 이제 너는 어느 납골당의 조그만 유골함에 누워있지 조각난 그리움들 아픈 손거스러미의 시간 손톱깎이로 짧게 잘라낸다  

자작시: 보일러, 팝콘

  보일러, 팝콘 드디어 장맛비가 내린다 쩍쩍 들러붙는 72퍼센트의 습도 딱, 딱, 따닥, 따닥, 딱, 딱 식탁에 앉아 맛대가리 없는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며 나는 낡은 집의 퀴즈를 푼다 1) 냉장고의 냉매가 흐르는 소리 2) 오래된 화장실의 타일이 깨지는 소리 3) 나무 문지방이 갈라지는 소리 아니오. 새로 설치한 보일러 연통에 빗방울이 튕기면서 내는 소리 개별난방 공사가 끝나고 아파트 보일러 기사는 한여름의 길바닥으로 밀려났다 대신에 누군가의 삶은 더럽게 윤택해졌을까 이제 비가 올 때마다 연통이 팝콘을 튀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참으로 신경질 나게 재수 없는 소리    

자작시: 하지(夏至)

  하지(夏至) 길어진 그림자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미쳐 날뛰는 아이처럼 내 마음 내버려두었지 그림자가 끝나는 곳 너는 여전히 고운 웃음을 흘리며 소름이 돋는 어떤 그리움을 말하겠지 빽빽한 바늘의 숲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 태양은 뜨겁고 늙은 흰색의 개는 비척거리며 걷지 죽음을 기다리며 느리게 변주되는 안온한 너의 세계 일상은 조용히 부패하지 행복은 검은 물처럼 흘러나와 부정맥의 혈관을 타고 그리움은 서서히 짧아져 그림자가 죽어야 할 시간 이제, 겨울의 심장을 향해 천천히 울음을 참으며 하지(夏至)의 행진을 시작하지    

자작시: 병원

    병원 1년째 투병 중이다 큰 병원에 다니고 있다 신경을 쪼개는 통증 의사도 원인을 모른다 이곳에는 환자가 너무너무 많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바로 옆 정신의학과 대기실로 간다 짐 좀 치워주시죠 이제 스무 살 안팎의 여자애 삐딱한 말투로 말한다 내 짐이 아니라고 하니 기분 나쁘게 툴툴거린다 왜 저딴 짐을 쌓아놓는 거야? 얘, 너 좀 이상해 그래서 정신의학과에 온 거야? 드디어 의사를 만난다 의사는 처방전을 찍어내는 기계 같다 말투는 빠르고 조급함이 느껴진다 나에게 주어진 3분 전번과 똑같은 진통제 처방, 항히스타민제는 빼주세요 약을 먹고 잠이 든다 늙은 남자가 검은 점박이 개를 풀어놓는다 입안에는 서걱거리는 모래가 한 줌 꿀꺽, 한동안 더 아플 모양이다  

자작시: 밀키스(Milkis)의 맛

  밀키스(Milkis)의 맛 오래전 주윤발(周潤發)의 광고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싸랑해요, 밀키스! 오랜만에 밀키스를 샀다 이걸 마지막으로 마신 지가 20년도 더 된 것 같아 익숙하고도 그리운 맛 그런데, 씁쓸한 밀키스 zero 어쩌면 나는 설탕의 시간을 추억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주윤발의 젊은 날과 나의 학생 시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삶은 그때도 괴로웠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래도, 밀키스의 맛 오늘처럼 그리워질 테지 식탁에 턱을 괴고 희뿌연 탄산음료에 축축한 눈을 맞춘다 자, 한잔해!  

자작시: 시의 쓸모

    시의 쓸모 시를 쓰다가 미쳐버린 사람 시를 쓰다가 굶어 죽은 사람 시를 쓰다가 중독자가 된 사람 혈관에 풀어놓은 뱀독 마냥 시가 인생을 삼켜버리고 결국 시인은 쪼그라든 아주 작은 점으로 무섭고 슬픈 이야기 6월, 모감주나무의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흘러내리고 아가의 옹알이 소리 살아있다는 것 아주 멀고 먼 옛날 라스코 동굴(Lascaux Caves)의 그들은 쓸모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지 미래의 독자에게 보내는 희미한 수신호(手信號) 재로 짓이겨진 동굴 벽 검푸른 자귀나무의 잎사귀를 그려본다    

자작시: 초여름, 산책

  초여름, 산책 참새는 대가리를 치고받으면서 싸우는 중이다 참새가 저렇게 사납게 구는 건 처음 본다 정말 무자유카는 주렁주렁 흰 꽃을 늘어뜨리고 자신의 때를 과시하지만 너에게는 향기가 없지 공원에는 처절한 세금 낭비인 노인 일자리 정책의 노인들 거리 청소를 위한 빗자루는 조용히 잠들어 있어 자식이 얼마나 용돈을 주는지 자랑을 늘어놓는 무료한 농담의 대잔치 자, 우리 초코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젊은 여자는 목줄을 풀고 강아지를 가슴에 품는다 건너편 아파트에서는 홀로 집을 지키는 개가 목이 터져라 짖고 있어 족저근막염에 걸린 발이 아파서 비명을 지를 무렵 어디선가 자그맣게 들리는 소리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달력에다 자그맣게 써넣는다 매미가 울기 시작함

자작시: 죽은 시인의 시

  죽은 시인의 시 아주 젊은 나이에 죽은 시인의 시를 읽었다 지상에서의 불행한 삶 가정폭력의 피해자 성소수자 그리고 시인이란 이름의 굴레 더럽고 슬프고 눈물과 분노가 가득한 절망의 시 시인은 영원의 시간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쾅, 미쳐서 죽지 않으려면 시를 쓰지 않는 편이 좋아 누군가 그렇게 충고하는 것을 들었다 정상(正常)의 삶은 쉽게 주어지지 않지 이해와 안온한 일상이 있는 풍경 저 너머 죽은 시인의 시가 꺽꺽 우는 소리를 낸다     

자작시: 때려주고 싶은

  때려주고 싶은 목이 고장난 선풍기는 앉는 법을 잊어버렸다 길게 늘어진 아픈 목에서는 가끔 끼익 끼익 소리가 난다 거 참, 듣기 싫군 그럴 땐 말이죠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한 대 딱, 때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대개는 기계들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가거든요 딱, 그렇게 선풍기를 한 번 세게 때려주었다 15년 된 컴퓨터의 하드가 드르륵거리며 힘겹게 작업을 할 때도 주저없이 때려주었다 가끔, 인생도 그렇게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한다 그런데 어딜 때려주어야 할까 약한 부분을 때려야지 아프게 움직이는 과거 오늘의 나는 전혀 새롭지 않으며 반복되는 이야기 툭, 찻잔의 이가 깨지며 떨어졌다 그래, 시를 쓰자 노래를 하자  

자작시: 너의 냉장고

  너의 냉장고 오렌지 주스는 발효되고 있었다 치익치익 보글보글 소리를 내면서 발효와 부패의 차이는 한끗이다 이 주스를 마실 것인가 버릴 것인가 한 모금 마셔 보니 이것은 진정한 알코올의 맛 탄산수에다 그 주스를 조금 넣는다 나는 기묘한 칵테일을 마시고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너의 냉장고는 지겹도록 단조로워 재미가 없어 모두 공장에서 만들어낸 그렇고 그런 가공식품들 냉동된 삶의 감각 네가 먹는 것이 너를 만든다고 하더군 시큼한 하품을 하며 주스는 수챗구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작시: 머리카락

  머리카락 쏟아지는 졸음에 잠시 눈을 붙였더니 미용실 아줌마는 내 머리를 너무 짧게 잘라놓았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울을 보니 중세의 수도사가 서 있다 그는 수도원의 삶에 지쳤다 어떻게든 여길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오래전 세상에 두고 온 연인이 있었다 이제 머리를 기르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가야지 하지만 회색의 빛나는 좀벌레가 둥지를 튼 머리에서는 좀처럼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다 눈에는 정체 모를 가루들이 발에는 커다란 티눈이 박혀서 그는 수도원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움질일 수가 없다 눈부신 너는 잘살고 있겠지 잘 면도된 맨질맨질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거울 앞에서 가만히 뒤돌아섰다 수도사의 머리카락은 이후로도 자라지 않을 것이며 멀어버린 눈과 걸을 수 없는 발로 그대로 잠들기를 원하리라    

자작시: 소비의 미학(美學)

  소비의 미학(美學) 최저가 검색은 언제나 옳지 않다 싸고 좋은 물건은 그 어디에도 없다 싸구려 옷을 걸치면 싼티 나는 인생이 되는 것 같다 머리에 아무리 많은 지식을 이고 있다 한들 사람들은 그저 겉껍데기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멋스런 차림도 결국은 돈으로 치덕치덕 발라야만 완성되는 궁극의 룩(look)이다 분명히 작년에 산 여름옷이 있을 텐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옷장에는 거대한 미로가 존재한다 나는 매번 길을 잃는다 옷들을 대충 욱여넣고는 서랍을 닫는다 여름 바지와 남방을 다시 사야 될 것 같다 뫼비우스의 띠 최저가 검색과 싼티 패션이 매끄럽게 이어지며 손을 잡는다 괜찮아 예술가는 소비의 미학을 해체하며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사람이야 그러므로 가난한 이 새벽, 너의 글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자작시: 나방

  나방 계단의 닫힌 창문 빠져나가려는 커다란 나방 한 마리 창문을 열어주었다 눈이 나쁜 나방은 한참을 헤매다가 눅진한 오후의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거실 커튼에 붙어있는 작은 나방은 손바닥으로 뭉개버렸다 맹목(盲目)의 아름다움 살려준 나방의 처연한 날개 말갛고 하얀, 잊을 수 없는 너의 손을 떠올려 버렸다 

자작시: 새벽, 배송

  새벽, 배송 새벽 2시 34분, 까박까박 식탁에서 졸다가 뚜우뚜우, 하는 소리에 잠이 깬다 누군가 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머리숱이 없는 중년의 키 작은 남자 새벽, 배송 자본의 힘으로 박탈된 수면과 노동은 고객에게 신속함과 편리함을 선사한다 식탁의 태블릿 PC 화면에는 외신 기사 사진이 펼쳐져 있다 전쟁이 터진 저 먼나라 폭격으로 어머니를 잃은 여자는 부서진 잔해 위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유럽의 부자 나라는 기후변화로 폭우가 쏟아져 도시가 물에 잠겼다 산다는 것의 무게 언젠가 죽음과 같은 밤으로 끝나겠지만 다시 또 한 번 뚜우뚜우, 힘겹게 새벽을 나르던 그는 가늘어지는 엔진 소리와 함께 떠났다    

자작시: 늙은 개

  늙은 개 흰색의 마른 개는 다리를 절며 걸었다 불규칙한 보폭으로 사부작사부작 늙음은 어딜 가나 송곳처럼 삐져나온다 염색물이 빠져버린 누리끼리한 머리 무릎이 나온 추리닝 바지 늙은 개의 주인도 늙음 속에 흐른다 개에게 남은 날을 헤아려 본다 늙은 개는 내년, 아파트 화단의 연분홍 철쭉과 탐스러운 푸른 수국을 볼 수 없으리라 늙고 병든 것들은 모두 질질 끌려가며 오래된 녹슨 자국을 아프게 남긴다 살았던 기억 지상의 빛나던 한순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자작시: 저녁, 놀이터

  저녁, 놀이터 조그만 계집아이는 신나서 튕겨 나갈 듯 그네에 몸을 매달고 그 옆의 배 나온 애비는 느릿느릿 자신의 그네로 반원(半圓)을 연주한다 이제 자식이 옆에 없는 늙은 남자는 희고 마른 강아지 한 마리를 벤치에 풀어놓고 휴대전화에 외로운 얼굴을 조용히 묻는다   건너편 아파트 입구 붉은 빛줄기 번득이며 구급차가 누군가를 실으려고 대기 중이다 어슬렁어슬렁 회색의 어린 고양이가 그 옆을 지나간다 며칠 전 한밤중에 으스러지게 짝을 불러대던 그 녀석이었을까 구급차는 아무도 태우지 않고 떠났다 짐짓 좋은 애비노릇하느라 지친 남자는 계집아이를 달래어 집으로 갔다 밤 9시, 정신이 가출해버린 애새끼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놀이터를 휘젓는다 아무도 미친 아이들을 탓하지 않으며 놀이터는 자비롭게 꾸벅꾸벅 졸음을 참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