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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자작시: 실패한 시

  실패한 시 망설이다가 하릴없이 걷다가 쓰린 속을 부여잡고도 쓴다 마음에 들지 않은 애새끼 얼굴을 괜히 쓰다듬어보듯 그래도 나가서 잘 놀거라 짐짓 따뜻한 말 한마디 그렇게 뒤돌아서면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 괜히 내보냈나 싶어져 많이 쓰다 보면 나아지겠지 그런 우스운 말은 하지 말아 모든 시는 실패한 시야 누군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어 그렇군,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언제고 다시 두드려 보게 되는

자작시: 납골당

  납골당 네 아빠는 명이 짧았지 그렇게 일찍 갈 게 뭐냐 엄마는 납골당에 올 때마다 그 말을 한다 남자는 납골당에 들어서자마자 처절하고 격렬한 울음을 쏟아내었다 나는 남자가 편하게 울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그는 단 5분 만에 울음을 그치고 편안해진 얼굴로 납골당을 떠났다 아마도 그의 눈물이 짜디짜질 때쯤,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다 스물셋 나이의 아가씨는 엄마와 함께 그곳에 잠들어 있다 엄마가 먼저 떠난 길을 한 달 후에 딸이 따라갔다 그곳에서 엄마와 함께 잘 지내렴 나는 위패(位牌)에 적힌 글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이제 홀로 남은 그가 잘 살아주길 바라면서 비쩍 마른 몸으로 흔들흔들 그네를 타던 아빠를 기억한다 아빠는 소설을 하나 쓰고 싶어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나는 영화를 한 편 찍고 싶었지만 여적지 아무것도 찍지 못했다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를 생각한다 어떤 인생의 이야기는 속으로 삼켜질 뿐이고 옷장 속에서 미소를 짓는 해골처럼 나는 옷장문을 열었다가 가만히 도로 닫았다       

자작시: 편도선(扁桃腺)

  편도선(扁桃腺) 만성 편도선염, 입니다 일단 항생제를 좀 드리죠 낫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고 편도선을 잘라내면 됩니다 그런데 나이들어서 그런 수술 하는 거, 쉽지는 않겠죠 환자 말 잘라먹기 심기 마구 긁어놓기 무례함으로 번들거리는 재수없는 저 상판대기 그래봤자 목구멍 전문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차가운 진찰실을 나오면서 너 같은 인간이 잘라내었을 무수한 편도선의 울음을 듣는다          

자작시: 다섯 명의 여자

    다섯 명의 여자 다섯 명의 여자가 지나갑니다 수인(囚人)처럼 줄줄이 하지만, 손은 묶여있지 않아요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어두워서 얼굴을 볼 수는 없어요 먹빛으로 떨어지는 슬픔의 죄 아주 오랫동안 꿈을 기록하고 연구했어요 아, 꿈 같은 거 믿지 않으신다구요? 그렇군요, 예전에 나도 그랬답니다 그런데, 이게 한 번 두 번 뭔가 맞아떨어지면 믿음이 생깁니다 말하자면 오래된 미래의 목소리 나보다 먼저 미래를 살아본 이가 알려주는 뭐, 그렇다고 예정된 불운을 막아낼 수는 없죠 끈적거리는 모래바람처럼 눈꺼풀을 닫고, 입술을 뜯어내며, 아픈 부스럼을 퍼뜨리며 나는 네 귀퉁이가 닳아버린, 두꺼운 꿈의 공책에 다섯 명의 여자를 천천히, 언제나 만년필로 목소리가 그물을 가만히 찢고 자신의 입으로 말을 시작합니다      

자작시: 눈썹

  눈썹 내가 하나 알려드리죠 사람의 눈은 말입니다 안쪽이 막혀있어요 아주 촘촘한 그물 그래서 눈에 뭐가 들어가도 다 거기에 걸려들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눈썹 같은 거 돌고 돌아서 다 나오게 아, 우리의 조물주는 눈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새벽에 내 눈에 들어간 눈썹 따위 하루 이틀? 아니면 일주일? 그것도 아니면 한 달? 어쨌든 돌아올 테지 하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 목이 부러진, 오래된 선풍기 이가 나가버린, 아끼는 찻잔 푹 꺼져버린 인생 슬리퍼 그리고, 너의 이름 수줍게 웃던 때가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났다 따끔, 눈썹이 돌아오려는 것이다 덜덜덜, 올여름을 끝으로 내버려질 선풍기가 아 프게 우는 소리를 낸다

자작시: 해석(解釋)

  해석(解釋)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어 너의 머릿속에서 쏟아져 나온 세균 같은 단어들, 자꾸 몸뚱이를 새로 불리면서 무수한 막대기들이 가끔, 네가 맨정신으로 쓴 것인가 혼자, 생각을 해보곤 하지 짹짹거리는 소리 뒤틀린 너의 말들, 더 나아가지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딸꾹질이 멈추질 않아 정규분포곡선의 아주 가장자리 주변부의 삶은 비좁게 닫혀있지 손바닥만 한 작은 창으로 보는 겨울 봄 여름 가을의 전부 더이상 읽지 않겠어 차라리, 나의 창문을 부수겠어 절벽 앞으로 곧장 달려가겠어      

자작시: 애타게 슬리퍼를 찾아

  애타게 슬리퍼를 찾아 1년째 낫지 않는 내 오른발은 매일 혼자 울었다 열을 냈다 눈을 흘겼다 코를 힝, 하고 풀었다 아픈 발이 아프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슬리퍼를 찾는다 기기묘묘한 슬리퍼의 세계 넌 슬리퍼 한 켤레에 6만 원짜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니? 기껏해야 석유에서 뽑아낸 가짜 고무 쪼가리가 선사할 6만 원어치의 편함은 어떤 것일까, 가만히, 혼자, 머릿속으로 아마도 내가 모르는 슬리퍼의 과학이 있을 거야 어쨌든 발을 편하게 해주는 미지(未知)와 필연(必然)의 과학이 그렇게 장사꾼의 과학을 믿다가 세 켤레의 슬리퍼가 신발장에서 지금은 꽃분홍색 욕실화를 신고 집안을 걸어 다닌다 2천 원짜리, 두툼한 밑창, 아가 신발처럼 뽁뽁거리는 소리 그제야 칭얼거리는 발이 울음을 멈추었다  

자작시: 시 선생

  시 선생 슬픔, 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시에는 감정어(感情語)를 쓰는 법이 아니라 했거늘 도대체 이 애송이는 어쩌자고 슬픔, 따위를 늘어놓고는 쉽게 읽히는 시는 가치가 없어 이딴 백일장 시 따위 난해함은 시의 목숨이고 본질이며 눈물이야 그걸 버린다면 그 순간부터 시가 아닌 거야 독자를 네가 알지 못하는 멀고 먼 곳에 데려가야지 발바닥이 녹아내리는 사막 뜨거운 맛을 보여주는 거야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아 미친 단어를 끌고 갈 데까지 가봐 그 정도 각오 없이 시를 쓰는 거야? 아무도 알아먹지 못할 시를 쓰고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어야지 유행(流行)은 중요해 남들이 짹짹거리는 소리 정도 읽을 줄은 알아야겠지 그리고 마지막, 시를 좋아하는 마음은 접도록 해 좋아하면 외로워지니까 반쯤의 증오를 품고 삐딱하게 바라보는 거야 나처럼 난해한 슬픔의 거리에서 시 선생이 그렇게 말했다  

자작시: 거대한 슬픔

    거대한 슬픔 아침부터 커피를 엎질렀어 삶은 계란의 껍질은 죽어도 까지지 않아 집 앞의 커다란 개는 우라지게 짖어 굉음의 폭주족은 비린내 나는 불안을 매달고 하루 종일 줄줄 울고 있어 꺼끌거리는 눈을 겨우 뜨고는 메일 박스를 연다 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세계 폭격으로 죽은 아이를 안은 남자는 울부짖고 있다 아! 먼 어딘가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슬픔이 흐르는데 손톱에 박힌 가시를 가만히 꾸욱, 조금, 아프다 하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겁쟁이 커다란 개가 짖는다 너도 살아 보겠다고 그런 것이겠지      

자작시: 관성(慣性)

  관성(慣性) 아파트의 경비는 아침 6시에 화단의 흙을 고른다 기다란 삼각 괭이로 흙바닥을 헤집고 다시 다지고 9월 늦더위, 땀을 훔치며 열심히 저 경비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들판의 논과 밭이 펼쳐져 있을지도 푸석거리는 머리를 나일론 리본 모자로 감춘 늙은 여자는 아침 산책을 나선다 유모차에는 작은 푸들 한 마리 어찌나 앙칼지게 짖는지 여자는 강아지가 어디가 불편한지 조심스럽게 살펴본다 성질 더러운 애새끼 달래듯 그런 자식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 청소부 아줌마는 1년 내내 빨강색 티셔츠만 입고 다닌다 왜 하필 빨강색일까? 기운이 나는 색이라서? 때가 덜 타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으므로 그냥 행운의 색, 이라고 생각하자 유통기한이 임박한 과일 맛 젤리를 질겅거리며 과일 맛에는 과일이 없어 사과 맛 포도 맛 딸기 맛 다 거짓부렁이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속아주는 기분 싸게 판다면 또 사줄 것 같아      

자작시: 습작기(習作期)

  습작기(習作期) 왜 날로 먹으려 드는 거야? 너, 시를 잘 쓰고 싶다면서 그럼 돈 좀 들여서 시 창작 강의라도 들어야지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시를 쓰는 것도 기술이 있어 그걸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쓴다는 거야 말하자면 시인들은 언어를 조련하는 조련사인 셈이지 그런데 넌, 그걸 무시하잖아 시를 그냥 계속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거지? 와, 어떻게 그런 무식한 생각을 하면서 시를 쓰고 있어? 그렇게 백날 써봐라 문단에 네가 들어올 수 있을 거 같아? 여긴 그러니까 프로페셔널의 무대인데, 너 같은 초짜를 끼워주겠냔 말이지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네가 말재주가 있다면 영업을 뛰는 거야 문학판 인맥을 쌓는 거지 어떤 면에서 그것도 재능이지 별거 아닌 너의 습작 쪼가리 들고서 아양도 떨고 읍소도 하면서 그렇게 친분을 쌓아가다 보면 가늘고 기다란 연줄이 될 수도 있지 아는 사람 더 잘 봐주고 그런 거 그걸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좀 나이브하게 굴지 마 말재주도 없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게 뭘까? 아, 얼굴이 좀 되면 그걸로 어떻게 밀어붙일 수도 있겠군 시가 이미지라는 말은 이제 웃기는 소리가 되어버렸어 시인이 이미지여야 해 팔아먹을 이미지 말이지 매일 인스타로 독자와 소통하고 번지르르한 일상을 인터넷 땔감으로 집어처넣는 우리 시대의 시인,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