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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자작시: 똥꿈

  똥꿈 소설 작법 수업의 소설가 선생은 참으로 솔직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등단작에 얽힌 이야기이며 이런저런 문단의 이야기도 재미나게 들려주었다 선생의 이야기 가운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 선생은 몇 개의 큰 문학상을 거머쥐었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꾼 꿈이 있다고 했다 바로 똥꿈이었다 선생은 꿈에서 엄청난 똥을 보면 돈이 생기겠구나, 라고 여겼다 선생이 받은 상들은 선생에게 큰 상금을 안겨주었다 나에게는 그런 돈이 되는 꿈은 없었다 똥이 돈으로 변하는 꿈의 마법이라니, 나도 그런 꿈을 꾸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똥꿈으로 상금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선생은 작가로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겠지 선생은 서서히 문단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선생의 화려한 등단을 생각하면 창작의 소재가 고갈된 작가의 삶이란 얼마나 고달픈가를 절로 깨닫게 된다 돌고 돌아 이제는 문학이 아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선생의 소식을 최근에서야 들었다 선생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을까? 내 생각에 선생에게는 여전히 똥꿈이 필요한 것 같았다 글을 쓰거나 공부하는 일, 그 두 가지는 여간해서는 돈을 만들어내기 힘든, 배고픈 일이기 때문이다           

자작시: 5분 후의 세계

  5분 후의 세계 오래전, 소설 작법 수업을 들을 때의 일이다 소설가 선생은 매주 다른 주제를 주었다 열 명 정도의 수강생이 각자 단편을 써오고 수강생들은 그걸 읽고 나서 합평(合評)을 했다 첫 주의 주제는 5분 후의 세계였다 아직도 기억나는 소설은 하굣길에 늘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갔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두 여학생의 이야기였다 재잘거리면서 걷던 여학생들은 5분 후에 닥칠 일을 결코 알지 못했다 뭔가 뻔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나는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갈림길, 인생의 어떤 선택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非可逆的) 손상을 가져온다 5분 후의 세계, 내가 그 주제로 쓴 단편은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에 절망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자의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런 우울한 이야기를 썼을까 싶기도 하다 여자는 아파트의 12층에서 살았다 여자가 죽어버리겠다고 갑자기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의 눈에 베란다 밖으로 쫙 펼쳐진 은색의 계단이 보였다 여자는 천천히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 남편과 다툰 후, 5분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설은 거기에서 끝나버렸다 소설가 선생과 그 수업의 학생들이 내 소설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소설 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구나, 이걸 어떻게 자꾸자꾸 써낼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 수업을 들었던 애들 가운데 작가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업을 가르쳤던 소설가 선생도 이제는 더이상 소설을 쓰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그 수업을 가르칠 때에도 선생은 소설 쓰는 일을 버거워했던 것 같다 아주 솔직하게, 자기도 뭘 가지고 소설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나도 오늘 무엇에 대해 쓸지 5분 전에는 알지 못했다        

자작시: Do you have plan B?

  Do you have plan B? 1. 원하는 대학교의 입시에서 떨어졌다고, 죽어버리겠다고 글을 쓴 애가 있었다 누군가 그 글에다 죽지 마, 라고 댓글을 썼다 아마 친절하게 그런 댓글을 쓰지 않아도 그 정도의 병신같은 치기(稚氣)라면 죽을 결심도 못할 것이다 또 다른 애는 자신을 떨어뜨린 학교를 저주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세상이 끝난 것 같지만, 끝난 것은 아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지만,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오늘, 내가 읽은 명언은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의 것이었다 데일 카네기는 철강왕 카네기가 아닌, 자기 계발 서적의 원조인데 인간관계에 대한 책을 써서 엄청나게 팔아먹었다 아무튼 그 아저씨의 말은 이러했다 좌절과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참으로 그럴듯한 말이다 그런데 해보고 해보다가 안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죽을 때까지 해봐야 할까? 가야 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2. 캐나다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남자가 있었다 편의점에 들어온 손님이 그에게 물었다 Do you have plan B? 그 질문을 받자, 남자는 머리가 아득해졌다 남자는 낯선 외국 땅에서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중이었다 도대체 지가 뭔데 저런 질문을 나한테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남자는 손님에게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No, I don't have it. 손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3. 나에게는 언제나 Plan A만이 존재했다 Plan B를 생각하다가도 Plan A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이상주의자의 비극이란 그런 것이다 Do you have plan B? 누가 나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캐나다 편의점의 그 남자처럼 답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남자는 손님이 나가자마자 구글 검색창에 plan B를 입력했다 자신이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Plan B는 유명한 사후피임약의 상표 이름이었다           

자작시: 숙제(宿題)

  숙제(宿題) 나는 숙제를 아주 잘 해내는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숙제부터 먼저 했다 당신의 편지는 나에게 숙제와도 같습니다 오래전, 나의 편지를 받은 H는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일까, 한참을 생각했었다 새벽에 꿈에서 깼는데, 꿈에서 나는 학교 안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자주 꾸는 꿈이다 나에게 그 꿈은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이 군대를 다시 가는 꿈과도 같다 꿈속의 학교는 언제나 아무도 없었고, 황량했다 사실 학교 꿈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꾸는 꿈이다 화장실 꿈도 마찬가지이다 애타게 화장실을 찾아다니지만, 그 일은 참으로 어렵고 거의 대부분 실패로 돌아간다 오로지 꿈만을 연구하는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꿈이 말해주는 건, 자기 내면에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거죠, 말하자면 숙제 같은 거에요, 숙제 꿈 교수의 강의를 듣다가, 나는 비로소 H가 말한 숙제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자작시: 심플한 삶

    심플한 삶 오늘 아침에 마신 커피는 맛이 없었다 나는 왜 커피가 맛이 없을까를 잠깐 생각하다가 신속하고 정확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 커피는 싸구려 커피이기 때문이다 돈, 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세계, 나는 인생이 참으로 명쾌하다는 생각을 하며 싸구려 커피를 기꺼이 들이킨다 인터넷 게시판에 어떤 여자가 자신의 부자 삼촌 이야기를 썼다 여자는 부자들에게는 확고부동한 삶의 원칙이 있다고 했다 바로바로 그것은 '시간이 돈'이라는 명제였다 여자의 삼촌은 물건을 살 때, 절대로 고민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매장에 가서 제일 좋은 것으로 주시오, 라고 말하면 끝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최저가 검색에 최적화된 일상을 살아갈 때, 부자는 시간을 아껴서 최고의 물건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물건을 고르느라 고민하는 시간을 아껴서 다른 생산적인 일, 아마도 돈을 열심히 굴리는 일이겠지만 거기에 매진한다고 했다 여자의 글에서는 보이지 않는 침이 마구마구 튀기는 것 같았다 부자들은요, 진짜 심플하게 정돈된 삶을 산다니까요 그렇다 가난은 삶을 매우 매우 복잡하게 만든다 돈이 없으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온갖 경우의 수를 상상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은 머리를 많이 쓸 수밖에 없다 최근의 과학 기사에 따르면 경제적 빈곤은 사람의 뇌를 쪼그라들게 만든다 가난한 사람의 뇌가 혹사당하는 것은 자명한 진실인 셈이다 복잡한 삶은 악덕이며 심플한 삶은 미덕이 된다 나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면서 복잡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저 너무 일찍 죽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작시: 참새들

  참새들 그해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부엌의 작은 창문으로 참새들이 나무에 앉아있는 것을 보다가 쟤들은 이 추운 겨울을 어찌 날까 걱정이 되었다 참으로 쓰잘데기없는 걱정이었다 궁리 끝에 나는 부엌 창문을 열고 그 앞에 쌀을 아주 조금 부어놓았다 하루 이틀 사흘, 그러다 일주일쯤 되었나 마침내 참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참새는 그 쌀을 야무지게 먹어 치웠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어떨 때는 참새들이 서너 마리씩 모여들었다 하지만 정겨운 풍경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들은 밥상과 뒷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한심한 족속이었다 시푸르딩딩한 참새똥이 부엌 창틀에 나뒹굴었다 정을 주는 일은 그렇게 더러운 것이다 나는 다시는 쌀을 놓아두지 않았다 손톱 만한 대가리를 가졌으므로 참새는 보름이 넘도록 창틀 앞을 얼쩡거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참새를 내어쫓았다 오지마 오지마 너희 먹을 건 아무것도 없어 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 더이상 참새는 오지 않았다 나는 안도했다 참새 따위는 지들끼리 잘 알아서 먹고 살 것이다

자작시: 플라시보(placebo)

  플라시보(placebo) 올해는 가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나무들은 단풍이 채 들기도 전에 나뭇잎을 떨군다 시간이 없는 것이다 얼른 살 궁리를 해야지 나는 외풍이 심한 집 창문에다 뽁뽁이를 겹겹이 이어서 붙인다 겨울이면 집안은 바람으로 꽉 들어찬다 나는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다 이깟 뽁뽁이 따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 붙인다 이건 마치 생강차가 목감기에 좋다는 민간요법을 믿는 것과도 같다 만성편도선염에 시달리는 나의 목은 늘 부어있다 항생제도 소용이 없다 배즙도 소용이 없다 생강차도 소용이 없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어디서 들으니 개량종 생강은 별 효과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시중에 파는 생강은 죄다 개량종 생강이다 사람들이 매운 것을 싫어하므로 생강은 매운맛을 버렸고, 크기만 커졌다 토종 생강, 그러니까 조선 생강이 효과가 있다는데, 그걸 파는 데가 없다 그 조그맣고 진짜 매운 조선 생강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나는 머릿속으로는 조선 생강을 상상하면서, 개량종 생강으로 우려낸 차를 마신다 조선 생강차를 먹으면 나아질 거라는 믿음, 그렇다, 믿음은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다 플라시보(placebo) 효과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나의 목은 나을 것이다 

자작시: 희망

  희망 책상 위의 시계가 5분 늦게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얼른 분침을 바로 잡아준다 하지만 이 시계는 점점 더 정각에서 멀어질 것이다 새 건전지를 끼워줘야겠지 나는 시계에 새 건전지를 끼워준 적이 한 번도 없다 원래 이런 시계는 쓰다 남은 건전지를 끼워도 잘도 간다 그런데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이 발견을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준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수명이 다한 것처럼 보이는 건전지가 그렇게 꾸역꾸역 지 목숨을 이어가는 것처럼 희망도 끈적끈적 점액을 내뿜으며 들러붙는다 슬프게도 희망이란 원래 버리라고 있는 것이다  

자작시: 이불

  이불 1. 아파트의 분리수거장에 그리 낡지 않은 매트리스와 이불이 나와 있다 이불은 두 개의 끈으로 잘 동여매져 있었다 금실과 은실로 수놓아진 진홍색의 솜이불 엄마가 시집올 때 해온 이불도 알록달록한 천에 수가 놓아져 있었다 장미와 모란과 학이 있는 이불 나는 버려진 옛날 이불에서 죽음의 기운을 읽는다 아마도 저 이불의 주인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깨끗해 보이는 매트리스도 그래서 함께 버려졌으리라 2. 가을 새벽, 소슬바람에 잠이 깼다 춥다, 나는 오리털 이불을 꺼내었다 덮어보니 무겁다, 최신의 과학 기사에 따르면 무거운 이불을 덮어야 잠이 잘 온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그 이유가 다소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이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깟 손바닥 두께만큼의 오리털 이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면 편안한 잠을 잘 수 없다 몇 번을 뒤척이다가 나는 인생에 얼마만큼의 무게가 더해져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지 생각한다 휘청거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그런 무게의 짐 하지만 나는 늘 휘청거렸다 3. 한때 극세사 이불이 크게 유행했었다 엄마는 극세사 이불이 마음에 들었는지 꽤 많이 사들였다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마다 샀다 극세사 이불의 색상은 거의 비슷했다 다홍색 빨강색 자주색 보라색 내게는 아주 옛날의 내복 색깔 같았다 그런데 엄마는 극세사 이불을 덮지 않았다 그걸 덮으면 너무 더워서 갑갑하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산 이불을 막내딸 혼수로 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동생은 이불 색깔이 촌스럽다며 가져가지 않았다 엄마가 사랑한 극세사 이불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나의 장롱에 오래도록 잠들어 있다        

자작시: 해결책

    해결책 작가가 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세요 뭐 필독서나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들어야 할 수업이 있다면 그것도 함께 일단 글을 쓰기 위한 뼈대를 세우고 나서 거기에 들어갈 내용은 좀 생각을 해봐야겠죠 참고할 만한 자료들도 모아보고 그렇게 내 글을 써나가고 싶거든요 자, 내가 해결책을 알려줄게 잘 쓰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해 어떻게든 오랫동안 버티면서 쓴다고 생각하면 뭐든 될 거야 말하자면 시간과의 싸움이지 너와 같이 출발한 사람이 어느 순간, 네 옆에 보이지 않을 때 네가 버티는 것은 더럽게도 힘들고 너의 글을 읽게 될 독자들은 저기 어디 외계 행성에나 있을 것이므로 너의 감수성은 미세플라스틱처럼 바스러지고 나중에는 그냥 도망쳐 버리고 싶어져 이봐, 알아들었어?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야      

자작시: 아픈 사과(沙果)

아픈 사과(沙果) 가려운 어깨를 긁는다 나의 병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1년째 오른쪽 발이 아프더니 이제는 왼쪽 발까지 아프다 걸을 수 없다고 죽을 수는 없는 법이지 하지만 욕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쓰레기통 밑바닥에 굴러다니는 푸른 사과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멀쩡해 보이는 사과 그 사과는 왜 버려졌을까 쓰레기의 내력을 헤아려 본다 저 사과는 아픈 사과다 아픈 것들은 죄다 멸시를 받고 눈물을 질질 흘리며 결국은 버려질 것이기에 앞집의 노인은 백 살을 앞두고 있다 몸이 아파서 바깥출입을 못한지가 꽤 되었다 봄과 가을에는 사망률이 치솟는다 나는 앞집 노인이 올가을을 넘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나에게 남은 생은 얼마나 되는지 그때까지 쓸 수 있는 글은 얼마나 되는지 그때까지 버려질 글을 또 얼마나 쓸지 가려운 어깨는 불길한 징조이다 붉은 반점도 우는 소리를 낸다 아픈 사과가 눈물을 흘린다    

자작시: 인사(人事, Greeting)

  인사(人事) 아파트의 청소 아줌마와 마주쳤다 인사를 하는 것이 어색해서 다른 출입구로 갔다 그런데 아줌마가 그쪽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나한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네, 수고하시네요 아줌마가 그냥 모른 척해주었으면 했다 나는 인사하는 것이 너무 싫다 사람 사는 세상, 그래도 온기가 있어야지 하지만 나는 그 머나먼 온기가 싫다 만나면 먼저 인사합시다 아파트 단지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있다 나는 그걸 볼 때마다 비뚤어진다 제발 아는 척하지 좀 말고 인사도 하지 않았으면 늙으신 엄마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젊은 여자와 여자의 어린 딸이 엄마에게 인사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할머니, 안녕하세요 엄마는 모르는 이들이었다 엄마가 활짝 웃었다

자작시: 가을 모기

  가을 모기 가을 모기에게 어깻죽지를 물렸다 최신의 과학 뉴스에 따르면 모기는 사람의 혈관을 흐르는 핏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어설픈 가을밤에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모기도 그런 신박한 재주가 있거늘 그까짓 재능 따위 산속의 다람쥐는 괴롭지 않다 길가의 강아지풀도 슬프지 않다 그들에게는 상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처가 있어야 멀리 날아간다 어깻죽지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상처는 낫지 않을 것이다 나을 생각이 없으므로

자작시: 길고양이와 여자

  길고양이와 여자 지나가던 젊은 여자가 길고양이를 보고는 생수병의 물을 땅바닥에 흘려보낸다 고양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멀찍이서 가만히 앉아있다 여자는 쪼그려 앉아서 고양이가 오길 기다리지만, 웃기는군, 고작 물 따위로 고양이를, 하다못해 멸치 대가리라도 들이밀던가 여자가 생수병을 흔들자, 고양이가 성질이 났는지 생수병을 연신 할퀴려 든다 재밌어서 그러는 거 아냐 바보인가 보네 인생의 진리를 몰라 give and take 여자는 참을성 있게 앉아서 계속 쓸데없이 물을 흘려보내고, 고양이는 여전히 여자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마침내, 나이든 부부가 그 옆을 지나가자 고양이는 놀라서 가버린다 여자는 잠시 동안 고양이가 오길 기다리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쓸데없이 그런 짓을, 그냥 가던 길이나 가야지

자작시: 면도날

  면도날 면도날이 팔랑거리면서 내려온다 축제에서 날리는 색종이들처럼 면도날 위의 삶 불운은 불공평하게 기울어져 있고 뒤뚱거리며 걷다가 결국 쏟아진다 색색의 조각난 면도날은 아스팔트 바닥에 짓이겨져 불그죽죽한 염료를 내뿜고 더러는 누군가의 머리에 내려앉아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간다 휘청거리면서 면도날 위를 걷는다 죽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나는 면도날의 꿈이 죽을 꿈인가 며칠 동안 근심했다 오래도록 저린 왼쪽 손으로 면도날을 쥐었다 면도날이 조용히 웃었다 살아갈 것이다

자작시: 소 한 마리

    소 한 마리 농부는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었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다리가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없어진 다리 하나는 밤이면 아프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들로 넘실거렸다 이렇게 다리 병신으로 사느니 죽는 게 낫다 농부는 그렇게 생각하고서는 죽을 결심으로 마을 어귀의 저수지로 갔다 어찌어찌 물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죽지 않았다 집의 대들보에 머리를 짓찧기도 하였다 하지만 작은 피딱지의 상처가 생겼을 뿐이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는 의사에게 가서 죽어버릴 약을 받아오기로 했다 나를 죽게 해주시오 의사는 농부의 잘린 다리를 보고는, 당신에게 소 한 마리를 처방하겠소 농부는 논을 팔아 소를 한 마리 샀다 이제 그는 아침에 소와 함께 집을 나선다 그리고 예전에 자신이 농사를 짓던 땅이 바라보이는 언덕배기로 간다 소가 풀을 뜯으면, 그는 그 소를 보면서 가만히 웃었다 다리 하나가 없는 방글라데시의 농부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자작시: 기일(忌日)

  기일(忌日) 새책을 읽는데 후두둑, 종이들이 떨어진다 읽지 않은 페이지, 나는 바닥의 종이들을 그러모으고는 스카치테이프와 가위를 들고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이걸 붙여서 읽을 것인지, 이 책은 어차피 버릴 책이다 그냥 한번 보고 버릴 책, 어차피 죽어버릴 인생, 그리고 잊힐, 하지만 잠시동안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재생되는 새벽 3시 반쯤이었다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 밤은 고요하고 추웠으며 구불거리며 흘러갔다 나의 발은 언제나 시렸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맨발로 자다가 양말을 신고 잠을 청해 본다 가을이다 그리고 오늘은 아버지의 기일(忌日)이다

자작시: 숙이 아줌마

  숙이 아줌마 숙이 아줌마는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아줌마는 교육자 집안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자랐는데,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늘 쪼들리며 살았다 아줌마는 벌이가 시원찮은 남편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부업을 하곤 했다 그래서 한때 문구점도 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를 따라 아줌마의 문구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줌마는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명리학(命理學)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재수생(再修生) 때의 일이다 아줌마는 이제 막 학력고사를 치룬 내 사주를 봐주었다 나는 아줌마의 실력을 별로 믿지 않았는데, 아무튼 그래도 무언가 좋은 말을 듣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나의 기대에 걸맞게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너는 정말로 돈을 많이 벌 거야 엄청난 산처럼, 그렇게 넌 돈에 둘러 쌓여있을 거야 며칠 전, 나는 쇼핑몰 앱에서 선착순 천 명에게 주는 적립금 이천 원을 힘겹게 받아내었다 아, 정말이지 무척 기뻤다 그 이천 원을 뭘 사는데 보태어 쓸까, 고민하다가 문득 숙이 아줌마 생각이 났다 돈의 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숙이 아줌마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줌마는 고혈압이었는데도 혈압약을 먹지 않았다 사이비 도사가 그런 약을 먹으면 일찍 죽는다고 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버터를 사야지, 내 인생에는 기름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작시: 죽은 나무

  죽은 나무 새벽에 꿈을 꾸었다 죽을 사(死)자가 아주 커다랗게 허공에 쓰여있었다 정말로 죽을 꿈인가 마음이 서늘해진다 지난 1년은 몸이 너무도 아파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버릴 시를 쓰느라 죽어버리고 싶었다 가끔은 그 모든 게 내 사주(四柱)에 단 하나뿐인 나무 목(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는 살아있는 기운인데 나무가 말라비틀어지고 나무가 바람을 가두지 못하고 나무가 고양이 울음에 놀라고 나무가 풀벌레와 함께 울고 나무가 사람을 진저리나게 싫어하고 나무가 나무가 나무가 죽어버린 나무에 물을 주면 백 년, 어쩌면 그 후에도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전설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마침표 없는 글에다 물을 따라 준다

자작시: 촛불

    촛불 하늘이 눅눅하다 비가 올 것 같다 현관에 촛불을 켜둔다 국군의 날, 억울하게 죽은 군인들 생각이 나서 그리고 10월에는 아버지 기일(忌日)이 있으니까 촛불은 차분하게 타오른다 어느 무당의 말을 들으니 촛불이 타는 모양새에도 뜻이 있다고 하더군 흔들리는 촛불은 불길하다지 벌써 지 몸뚱이의 절반을 태운 싸구려 양초는 상자곽에 쓰여 있는 제사용 고급 양초의 명성을 배반한다 고급의 인생은 어떤 것인지 잠깐 생각을 해본다 좋은 차, 좋은 집, 잘 먹고 잘사는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되는 결국은 고급의 그 어떤 중심의 삶 촛불이 잠시 흔들린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어린 시절, 나의 피아노 가방에는 기도하는 소녀가 그려져 있었는데 소녀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아마도 촛불의 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고요하게 타는 촛불 불쌍한 영혼들, 이 세상 어디에서 헤매지 말고 잘들 가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