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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만난 바냐 아저씨, 세 편의 영화로 만들어진 Uncle Vanya



바냐 아저씨(Дядя Ваня, 1970),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 1시간 44분 
바냐 아저씨(Uncle Vanya, 1991), 그레고리 모셔 감독, 2시간 10분
42번가의 바냐(Vanya on 42nd Street, 1994), 루이 말 감독, 1시간 59분

 


1. 들어가며

  희곡 대본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일은 과연 쉬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작품성이 검증된 대본이 나와있으니 쉬울 것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평론가들조차도 연극 공연을 그냥 영화로 찍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시드니 루멧이 1962년에 유진 오닐의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를 영화로 만들어 내놓았을 때도 그런 반응이었다. 루멧은 자신의 경력을 Off-Broadway(브로드웨이의 소규모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감독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연극적 공간과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또 뛰어난 영화 감독으로서 영화 제작의 메커니즘도 꿰뚫고 있었다. 그런 그의 연극에 대한 애정으로 만든 '밤으로의 긴 여로'는 개봉 당시 평론가들의 냉대를 받았다. 그들의 눈에 루멧의 영화는 공연되는 연극을 카메라 한 대 놓고 찍은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시드니 루멧은 영화 평론가들의 무지와 한심함에 분개했다. 등장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 묘사를 위해서 루멧은 다양하게 쇼트들을 구성했다. 표준 렌즈를 비롯해 장촛점 렌즈와 광각 렌즈를 번갈아 가며 공간의 깊이를 달리해서 보여줬는데, 그걸 알아차리는 평론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촬영의 기본적인 메커니즘도 모르는 평론가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루멧이 '밤으로의 긴 여로'를 통해 받았던 오해와 혹평은 희곡을 영화로 만드는 감독이 처할 수 있는 어려움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위대한 극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희곡 '바냐 아저씨(Uncle Vanya)'는 1898년에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인 1899년에 초연된 이후, 이 연극은 고전으로 자리잡으면서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연히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세 편의 영화를 뽑았다. 구 소련 시절 모스 필름(Mosfilm)에서 제작된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1970년도 영화, 1991년에 영국 BBC와 미국 WNET TV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TV용 영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이 말 감독의 1994년작 '42번가의 바냐(Vanya on 42nd Street)'이다. 이들 영화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체호프의 희곡을 영화적으로 변주했는지 살펴 보려고 한다.


***바냐 아저씨 줄거리***

  47세의 이반(바냐 아저씨)은 어머니 마리아, 조카 소피아와 시골 영지 저택에서 살고 있다. 세상을 먼저 떠난 누이의 지참금이었던 저택은 매형 세레브리야코프 교수의 것이 되었다. 세레브리야코프는 25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뒤로 하고 젊은 아내 엘레나와 시골로 내려왔다. 바냐는 젊은 날 자신이 사랑했던 엘레나가 늙은 교수와 결혼해서 사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는 엘레나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지만 엘레나의 마음은 딴 데 있다. 자신의 늙음과 병고로 신경질을 부리는 남편에게 지친 엘레나는 바냐의 집에 잠시 머무르는 마을 의사 아스트로프에게 매혹된다. 세레브리야코프의 딸 소피아는 아스트로프를 6년 동안 사모해왔지만, 아스트로프는 그런 소피아에게 무관심하다.

  아스트로프는 엘레나를 유혹하고, 바냐는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눈치채고 절망한다. 소피아도 아스트로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세레브리야코프는 보다 여유로운 삶을 위해 바냐의 저택과 영지를 처분하겠다고 선언한다. 적은 보수를 받고 그동안 영지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수익금을 교수에게 보냈던 바냐는 자신과 조카의 삶이 무너질 수 있는 위기에 격분한다. 바냐는 교수를 비난하고 모욕을 주고,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의 무능함을 지적하며 사위를 두둔한다. 바냐는 교수에게 총을 쏘지만 빗나간다. 그 모든 상황에 놀라고 정나미가 떨어진 세레브리야코프는 아내와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스트로프도 떠난다. 소피아는 희망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바냐 삼촌을 위로하며,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시드니 루멧의 '밤으로의 긴 여로(1962)'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448507


2. 가장 러시아적인 콘찰로프스키의 '바냐 아저씨'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Andrei Konchalovsky) 감독은 친분이 있던 배우 이노켄티 스목투노프스키(Innokenti Smoktunovsky)와 체호프의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목투노프스키는 영화 배우이면서 연극 쪽에서 더 많은 공연을 했다. 모스필름은 콘찰로프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전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았다. 1970년에 제작된 이 영화에 컬러와 흑백 필름이 혼용되어서 사용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비싼 컬러 필름을 제공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모스필름은 제공되는 필름의 일부분을 흑백 필름으로 떠넘겼다. 콘찰로프스키 감독은 하는 수 없이 두 종류의 필름을 가지고 촬영을 해야만 했는데, 그의 탁월한 감각으로 영화의 완성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콘찰로프스키는 희곡 대본이 갖는 연극적 공간의 평면성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식을 사용했다. 장면에 따라 흑백과 컬러를 적절히 나누어 찍었고, 인물과 공간을 보여주는 쇼트들의 구성에도 변화를 주었다. 연극에서 '암전
(轉)'에 해당하는 막의 전환은 인물의 얼굴에 비추어지는 조명을 서서히 어둡게 함으로써 표현했다. 콘찰로프스키는 체호프의 희곡 대본에 충실하기는 했으나,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옮기지는 않았다. 그 예로 2막에 나오는 엘레나와 바냐의 독백 부분이 생략된 것을 들 수가 있다. 아마도 그는 그 부분이 너무나도 연극적으로 보여서 자연스럽게 대화로 이어지는 흐름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콘찰로프스키의 '바냐 아저씨'를 가장 러시아적인 것으로 만든 일등 공신은 주인공 바냐 아저씨 역을 연기한 이노켄티 스목투노프스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낭비한 인생에 대한 회한과 과거에 대한 향수로 살아가는 '바냐 아저씨'란 캐릭터를 절제되고 깊이있는 연기로 보여준다. 배우들 사이의 연기 앙상블도 좋은 편이다. 의사 아스트로프 역을 맡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Sergei Bondarchuk)는 솔직히 그 배역과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감독으로도 유명했던 본다르추크는 원래 VGIK(러시아 국립 영화학교) 연기과 출신으로 배우로도 활약했다. 영화 속 본다르추크의 연기에는 다소 과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연기력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본다르추크는 의사인 아스트로프가 귀족 출신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값비싼 좋은 의상을 입고 싶어했다. 그와는 달리 콘찰로프스키는 후줄근하고 구깃구깃한 평상복을 입으라고 지시했다. 촬영 내내 사사건건 부딪혔던 두 사람의 갈등은 급기야 불미스럽게 끝났다. 영화를 끝내고 당 중앙위원회로 달려간 본다르추크는 콘찰로프스키의 이 영화가 반 러시아적이며, 반 체호프적인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걸 속어로 표현한다면 '곤조 부린다'에 딱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 본다르추크의 어깃장과는 관계없이 영화는 해외 영화제에서도 수상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바냐 아저씨'는 체호프적인 것에 대한 진중한 고민을 영화로 잘 녹여서 보여준다. 연극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이 상충되거나 어느 한 편에 과도하게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이 작품은 오리지널의 품격이 무엇인지를 입증한다. 어떤 면에서 체호프가 러시아어로 쓴 희곡의 의미와 그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러시아인들일 것이다. 러시아의 현대 음악 작곡가로 1970년대 많은 소련 영화 음악을 담당한 알프레드 슈니트케(Alfred Schnitke)의 음악도 영화의 비감함을 부각시킨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Platonov'를 각색한 니키타 미할코프의 영화(1977)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1977.html
안드레이 스목투프스키 주연의 영화 '차 조심!(196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8/beware-of-car-1966.html



3. 영화적 메커니즘에 대한 몰이해가 낳은 범작, 영미 합작의 TV 영화 '바냐 아저씨'

  콘찰로프스키 감독의 '바냐 아저씨'가 희곡을 스크린에 멋지게 펼쳐놓았다면, 1991년에 만들어진 영미 합작의 TV 영화는 실패작에 가깝다. 감독 그레고리 모셔(Gregory Mosher)는 링컨 센터의 극장 감독으로 이 프로젝트를 맡았다. 원작 희곡의 각색자는 미국의 극작가이며 감독으로도 활동한 데이비드 메밋(David Mamet)이다. 재능있는 극작가답게 메밋이 다듬어낸 영어 대사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이 영화는 영국과 미국 배우들이 함께 작업했는데, 그렇게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뭔가 삐걱거리면서도 굴러가는 마차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제작 기간이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스트로프 역의 이안 홀름(Ian Holm)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기는 하다.

  이 영미 합작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적 메커니즘에 대한 감독의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다. 거의 대부분이 미디엄 쇼트와 클로즈업 쇼트로 구성된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영화 내내 등장인물의 얼굴 밖에 안보인다. 심지어 배우와 공간 전체를 다 잡은 풀 쇼트도 거의 없어서, 세트를 구성하는 집안의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도 파악이 안된다. 그렇게 화면을 구성했으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2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동안 쏟아지는 지루함을 견딜 수 밖에 없다. 영국식과 미국식 억양이 뒤섞인 대사들도 조화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 TV용 '바냐 아저씨'는 그냥 걸러도(!) 괜찮은 영화인 걸까? 체호프의 열렬한 팬이라면 놓치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안 홀름이 연기한 아스트로프가 무척 좋다. 원작에서 의사 아스트로프는 잘 생긴 외모의 중년 남자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안 홀름은 그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비교적 작은 체구의 이 배우가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바냐 역을 맡은 데이비드 워너의 비중을 압도한다. 솔직히 이 영화의 제목은 '바냐 아저씨'가 아니라 '의사 아스트로프'가 되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극 전체를 사로잡는 이안 홀름의 연기 때문에 다른 배우들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각색자 데이비드 메밋의 아내로 소피아 역을 맡은 레베카 피전의 뜬금없는 캐스팅도 아쉽기는 하다. 피전이 무리없이 배역을 소화해내기는 했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는 것에는 실패했다. 이렇게 연기와 영화적인 구성 면에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바냐 아저씨'는 연극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경우라 하겠다.    


4. 영화 천재 루이 말의 마지막 역작, '42번가의 바냐'

  영화는 경쾌한 재즈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뉴욕 42번가의 거리를 비춰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독특한 영화는 연극 '바냐 아저씨'를 42번가의 버려진 극장에서 극단 배우들이 리허설하는 장면을 담아낸다는 설정으로 기획되었다. 루이 말(Louis Malle)의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My Dinner with Andre, 1981)'를 즐겁게 보았던 이라면 이 영화도 놓칠 수 없다.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에서 같이 작업했던 두 연극인 앙드레 그레고리(André Gregory)와 월레스 숀(Wallace Shawn)이 '42번가의 바냐'에서도 나온다. 주인공 바냐 역은 월레스 숀이 맡았다. 영화에서 리허설 하는 장면의 연극 대본은 앞서 다룬 TV용 영화 대본을 각색했던 데이비드 메밋의 것을 그대로 썼다.

  극장으로 가는 길에 친구 앙드레를 만난 월레스는 자신이 기획한 연극 '바냐 아저씨' 리허설에 초대한다. 그렇게 앙드레와 그 지인들 몇몇이 모여 낡고 허름한 New Amsterdam Theater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리허설을 구경하러 간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연극이 시작된다. 영화 속에서 리허설이 이루어지는 극장이 매우 눈길을 끈다. 1900년 초부터 대공황에 이르는 시기에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설되었던 뉴 암스테르담 극장은 쇠락기에 접어들면서 1970년대에는 흉물스런 건물이 되고 말았다. 연극 연출가 앙드레 그레고리는 가까운 사이의 배우들을 모아 '바냐 아저씨'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루이 말은 소식을 듣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위해 선택한 장소가 바로 그 42번가의 뉴 암스테르담 극장이었다. 그렇게 해서 '42번가의 바냐'가 탄생했다.

  이 영화에서 엘레나 역은 줄리언 무어가 맡았다. 무어의 좋은 연기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영화 제작 당시 이제 막 전성기에 접어드는 이 여배우는 명민하고 세련된 자신만의 배역 분석을 보여준다.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에서 궁색한 연극 배우를 능청스럽게 연기했던 월레스 숀의 열정적이고 감성적인 '바냐 아저씨'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른 배우들도 모두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라 정말이지 뛰어난 연기호흡을 자랑한다. 그런 좋은 연기와 함께 내러티브도 개성적이다. '리허설'이라는 설정 때문에 1막이 끝나고 휴식 시간을 갖는 장면을 비롯해, 구경하는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매우 자연스럽다.

  배우들의 좋은 연기에 빛나는 화관을 얹어주는 것은 감독 루이 말의 감각적인 화면 구성 능력이다. 어떻게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 쇼트들이 거의 없다. 그는 매번 카메라의 위치를 바꾸어 가며, 배우들의 동선과 공간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한마디로 '이 사람은 영화 천재구나', 그런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루이 말은 '바냐 아저씨'의 연극적 공간과 의미에 대한 영화적 탐구를 '42번가의 바냐'에서 멋지게 구현한다. 나는 아직까지 이 정도로 연극을 영화라는 매체적 특성에 부합하게 만들어낸 작품은 만나지 못했다. 만약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만나고 싶어하는 독자가 있다면, 꼭 '42번가의 바냐'를 보길 바란다. 루이 말은 이 영화를 완성하고 이듬해에 세상을 떴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천재 감독은 후대의 관객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남겨두고 갔다.

  '바냐 아저씨'를 세 편의 영화로 보다 보니, 나중에는 배우들의 동선과 대사까지 줄줄 꿰게 되었다. 체호프의 이 희곡은 계속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다. 아마도 그런 질문을 던질 독자도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 러시아 시골 귀족의 케케묵은 소동극이 무어 그리 볼 게 있겠느냐고... 체호프가 그려낸 인물들의 삶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고통받는 인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회한, 늙음과 질병, 생계와 돈에 대한 압박, 환경 파괴의 문제, 이 모든 것이 '바냐 아저씨'에 들어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또한 '바냐 아저씨'의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속성은 다면적이다. 왜 바냐 삼촌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들의 저택과 땅을 팔겠다는 교수 사위의 편을 들까? 바냐 삼촌이 세레브리야코프에게 총까지 쏘게 되는 것은 매형에 대한 증오일까, 아니면 생을 낭비한 자신에 대한 절망일까? 소피아가 어떻게든 남아있는 날들을 살아가야 한다고 마지막에 읊조리는 것은 희망의 표현일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체념일까? 그 모든 것을 곱씹게 되는 것이야말로 작가 체호프가 후대의 독자에게 남긴 아름다운 문학적 수수께끼이다.       


루이 말의 '앙드레와의 저녁식사(1981)'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790460


*사진 출처: poetree.ru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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